프롤로그''난 늘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말라.'넌 영원히 마르지 않는 나만의 오아시스야.'나 외엔 어느 누구도 널 가질 수 없어.''' 그의 방으로 들어 설 때면 온 몸의 모든 감각 기관들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다. 이번에도 그저 참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온갖 모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나를 짓밟으려 할지라도 난 그저 잠시 동안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볼 것이다. 온 몸과 마음에 가시를 세우고 얼굴엔 표정을 지운 채 살며시 그의 방문을 열었다. '그의 방에선 언제나 한결같은 향기가 난다.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드럽고 따스한 향이. 상당히 이질적인 듯하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는 내가 방에 들어 설 시간이면 언제나 그렇듯 방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다. 마치 내가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건 맘껏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뿐이라는 것을.'“5분 늦었어.”'그의 조금은 잠긴 듯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생소하다. 차갑고 오만한 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가 왜 내 귀에는 이처럼 애처롭게 들리는 걸까. 마치 거대한 초원에서 길을 잃고 잔뜩 겁을 먹은 한 마리 아기 사자의 울부짖음 같다고나 할까. 이런 생각에 순간 자조적인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누가 누구를 애처롭다고 생각해야하는지를 잠시 망각한 듯한 어리석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사자라면 난 그의 손 안에 잡힌 한 마리 사슴에 불과할 테니까.'“이쪽으로 와.”'그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가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온 몸의 힘이 서서히 빠져 나감을 느낀다. '“오늘 나한테 무슨 할 말 없어?”'“…….”'그는 늘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 난 그저 그의 명령대로 따르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먼저 무슨 말인가를 하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마치, 마지막 기회를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훗. 침묵으로 일관하시겠다, 이 말이군. 좋아,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는 것도 재밌겠지. 원래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을 정복하는 것이 훨씬 더 짜릿한 법이거든.”'비릿한 미소를 입에 물고 나른하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내 입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내가 분명히 말했지. 윤도진하고 다시는 말도 하지 말고 시선도 마주치지 말라고 말이야. 그런데 넌 또 내 말을 어기고 잘도 윤도진 그 녀석하고 붙어 있더군. 왜? 이젠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아님 윤도진 그 녀석이 내 말보다도 더 지킬 가치가 있기 때문 인거야? 훗, 하긴 너도 별 수 없겠지. 윤도진 그 녀석 네도 좀 살지 아마? 고아주제에 단단한 동아줄이라도 붙잡아야 세상의 멸시를 조금이라도 덜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