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 집에서 나가!”'“아, 아줌마?”'“지숙이 고년과 똑같이 닮은 네 낯짝만 봐도 치가 떨린다. 빨랑 짐 싸서 나가지 못해?”'한겨울의 시리도록 차가운 강물에 엄마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온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사건 앞에 윤화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그녀보다 여덟 살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이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당장 어디로 간단 말인가. 생각만으로 현기증이 일며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라 황급히 정애의 팔을 잡으며 사정했다.'“아줌마, 방을 얻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네?”'정애는 남편을 앗아간 지숙이년의 얼굴과 붕어빵처럼 닮은 윤화를 단 일초도 자신의 집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깨부수며 고함을 질렀다.'“흥, 이제 안 속는다. 안속아. 네 발 달린 짐승은 거둬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두는 게 아니라 했어. 당장 나가지 못해!”'입에 거품을 물며 미친 사람처럼 집 안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들을 모조리 부수며 생난리를 치는 정애를 보자 겁에 질린 동윤이 윤화의 품속을 파고들며 울먹였다. '“누, 누나?”'“시끄러워! 어디서 울고 지랄이야? 당장 나가!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지란 말이다.”'“아주머니, 이 추운 겨울에 당장 나가라 그러시면 저희들은 갈 곳이 없어요. 그러니 제발 며칠만이라도 시간을 주세요. 네?”'“걱정마라. 네 어미의 얼굴을 빼다 박은 네 그 반반한 얼굴로 엉덩이만 실룩거려봐라. 당장 잠잘 곳을 제공하려는 사내들이 줄을 설 테니.”'“…….”'정애의 지독히도 모멸스러운 언어폭력 앞에 그녀를 잡고 있던 윤화의 팔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정애는 자존심을 세우는 윤화를 우습다는 듯 쳐다보며 이죽거렸다.'“흥, 꼴에 자존심은 살아있다 이거지? 사내라면 환장하여 덤비던 지숙이년의 피를 받은 너는 다를 줄 아느냐?”'“…….”'“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뭐해?”'제 성격에 못 이겨 파르르 몸을 떨어대던 정애는 멍하니 서 있는 윤화와 동윤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질질 끌고서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내쫓아버렸다.'쾅!'육중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윤화의 심장에 철심처럼 파고들었다. '“누, 누나 우리 이제 어떡해…….”'윤화는 자꾸만 멀어지려는 정신을 바짝 잡아 당겼다. 그녀의 옆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동윤을 끌어안으며 위로했다.'“괜찮아, 괜찮아. 누나가 있잖아. 다 잘 될 거야.”'부둥켜안고서 서로를 위로하는 두 남매를 보며 동네 아줌마들 몇몇이 지나가며 수군거렸다.'“쯧쯧, 네 발 가진 짐승은 거둬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봐야 배신밖에 당할게 없다는 옛말이 하나 그른 게 없다니까. 아무리 사내에게 환장을 해도 그렇지, 저렇게 어린 자식을 두고서 가족처럼 돌봐준 친구의 남편을 꼬드기다니. 천벌을 받아도 싸지 싸.”'윤화는 아무 말 없이 동윤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다 지나가리라. 힘겹고 서러운 것도 다 지나가게 되리라. '“쯧쯧,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지숙이 고년도 바람이 나려면 봄에나 날 것이지 하필이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바람이 날 게 뭐람.”'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들처럼 이죽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에 그들 남매를 걱정하는 진심이 가득 배어 있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평소 자신의 엄마와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던 미숙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서 있었다. '“아주머니?”'“그래, 그래. 어린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무정하게 떠나버린 지숙이년이 죄가 크지. 가자.”'“어, 어딜…….”'“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그, 그렇지만…….”'그녀의 집도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다. 두 남매가 뻔뻔스럽게 부대낄 정도로 방이 많은 것도 아니다. 윤화의 걱정을 읽은 미숙이 걱정 말라는 듯 시원스럽게 말했다.'“수경이와 네가 한 방 쓰고 동윤이는 인준이와 성준이가 자는 방에 끼어 자면 된다.”'“흑흑…….”'윤화는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미숙은 고마움에 사무쳐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윤화의 등을 토닥이며 동윤의 손을 잡았다.'“울기는? 어서 가자. 동윤이 감기 걸리겠다.”'“흑……아주머니 고맙습니다.”''스물여덟 살 그 여자의 현재''꿈을 꿨다. '넓고 깊은 강 건너편에 실루엣만 보이는 어떤 남자가 강 이편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빨리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꿈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강가는 흐르는 강물 외에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사막처럼 건조했지만 건너편은 모래톱도 간간이 보이는 아름다운 강변이었다.'초록잎사귀가 선명한 버드나무들이 숲속처럼 우거졌고, 불어오는 바람에 축 늘어진 가지들이 수면을 잔잔하게 흔들고 있었다. 남자는 그림 속의 풍경화 같은 그곳으로 빨리 건너오라며 연방 손짓을 해댔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군데군데 아름다운 모래톱이 있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그곳으로, 그 남자가 있는 그 곳으로 윤화는 건너가고 싶었다. '남자는 점점 멀어지는데……아…… 강은 너무나 깊고 넓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다리도 없다. 그녀를 건너게 해 줄 배도 없다. '어떡해, 어떡해……. 윤화는 안타까움에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따르릉, 따르릉, 따르릉…….'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계속 울리는 벨 소리에 윤화는 번쩍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두웠고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눈을 감는데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그녀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급히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여보세요?”'[윤화니? 나다.]'핸드폰으로 들려오는 미숙의 다급한 목소리에 윤화는 벌떡 일어났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아저씨가 위독하시구나. 인준이도 없고 윤화 너밖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서…….]'“걱정 마세요. 제가 지금 곧 갈게요.” '윤화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스위치를 켜고서 손에 잡히는 대로 청바지에 블라우스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왜 갑자기 꿈속에서 낯선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오라고 손짓했는지, 그토록 선명한 꿈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는 것 따윈 깊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