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간을 봤다. 그녀는 미묘한 맛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생글거리며 웃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선율과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행복감에 선미는 기분이 좋아졌다.'“어?”'선미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봤다. 그녀는 된장찌개를 간 보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우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앞치마를 입고 있는 선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선미는 우진을 향해서 방긋 웃으며 그를 맞아 주었다.'“왔어?”'“그래.”'우진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를 향해 미소 짓는 선미의 반가움과는 달리 우진의 얼굴은 어두웠다. 선미는 오랜만에 보는 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선미는 약간 검은 피부가 매력적인 빛깔을 띠는 그의 피부색을 좋아했다. 우진의 무표정에도 선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재킷을 받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으로 떨어진 것은 재킷이 아닌 갈색 서류 봉투였다.'“이게 뭐야?”'선미는 우진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보고 물었다. 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선미가 봉투를 열 때까지 기다렸다. 선미는 무언의 압박에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어 확인했다. 선미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서류와 우진을 번갈아보았다. 선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우진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을 뱉었다.'“도장 찍어.”'“뭐? 도장?”'우진의 첫 마디에서 나온 말에 선미는 놀라 서류를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선미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며 등을 돌렸다. 우진은 그녀의 반응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해 줬어,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이혼할 차례야.”'봉투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선미와 우진의 이혼서류였다. 이미 우진의 도장은 찍혀 있는 상태였다. 선미는 짜증스럽게 서류를 집어 들어 우진에게 던져 버렸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표출했다.'“당, 당신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야? 그래서 오늘 집에 들어온다고 한 거야?”'선미의 어이없음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우진은 그런 선미의 태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우진은 떨어진 이혼서류를 다시 그녀에게 내밀고 입을 열었다.'“도장만 찍어, 나머지는…….”'철썩.'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 선미는 그의 뺨을 갈겼다. 선미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할 말만 하는 우진이 꼴 보기 싫었다. 우진은 오른쪽 뺨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계속 말을 이었다.'“나머지는 내가 알서 해, 도장 찍어.”'우진은 끝까지 자신이 할 말만을 내뱉었다. 선미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진은 선미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선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소리쳤다.'“당신 나한테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울지 마, 짜증나니까, 네가 울면 내가 꼭 나쁜 자식 된 거 같아서 불쾌해.”'“지금 그게 할 말이야!”'선미는 우진을 향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우진은 그녀의 눈물이 짜증이 났는지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선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가 안쓰러워서도 미안해서도 아니었다. 여자의 눈물이 싫었고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데서 오는 짜증의 표출이었다. 우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우리 집에서도 원했고 너희 집에서도 원했어, 그래서 결혼했어, 처음부터 결혼 생활을 얼마나 해야 한다는 거, 정해져 있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이쯤에서 끝내.”'“당, 당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결혼 생활을 정해 놓고 하는 부부가 어디 있어!”'“여기 있잖아, 우리 결혼도 처음부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였어, 그만 끝내는 게 너한테도 좋아, 넌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 아니야, 진선미, 너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그러니까 그만하자.”'선미는 차가운 우진의 얼굴에 가슴이 미어졌다. 우진은 감정이 없는 인간처럼 모든 말들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그가 하는 것들은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다. 선미는 우진을 향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그냥 차라리 당신답게 말해, 구질구질하게 말 늘어놓지 말고!”'“짐은 알아서 빼가, 어차피 출장 때문에 한동안은 안 들어올 테니까.”'“잔인한 사람,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한순간도 나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진선미, 너 몇 살이야?”'선미는 우진의 잔인함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바닥으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우진과 선미가 함께 살던 집은 우진이 혼자서 살던 집이었다. 선미의 손길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지만 우진에게 문제되지 않았다. 선미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추억도 없었고 집 안 곳곳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들은 그에게 무의한 것이었다. 선미는 잔인할 만큼 냉정한 우진의 이혼 통보에 대성통곡을 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미안하다고 말 안 해, 어차피 믿지도 않겠지만.”'우진은 마지막 말만 남겨 놓고 현관을 빠져나갔다. 우진은 현관문을 닫고 문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문 건너편에는 선미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두 번째 이혼도 처음처럼 순탄하지 않은 과정을 겪을 것 같았다.'“나쁜 자식아! 나쁜 자식, 송우진!”'문 뒤에서는 선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울렸지만 우진에게는 짜증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우진은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위해 오피스텔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