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길. 긴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여인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주택가이지만 가로등은 이미 제구실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너무나 야심한 시간이라 집집마다 불을 꺼져 있었다. 그 탓일까. 밝은 해가 떠 있을 땐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이곳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좁은 골목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둠이라는 특성 때문이리라. '하얀 원피스의 여인은 숨을 죽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아이 씨, 그냥 진희 집에 자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왜 오라고 해가지고…….”'오늘따라 더욱더 무섭게 느껴졌다. 꼭 담력 테스트 받던 학창시절의 수련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그 탓에 숨도 제대로 쉴 수도 없으며, 떨려서 한발 한발 떼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 지금 여인은 그런 느낌이었다.'부스럭.'누군가의 인기척에 여인은 흠칫 놀라며 우뚝 멈춰 섰다.'이 시간에 누구일까? '조금 잘 사는 집 담을 넘던 도둑? '아니면 여자들에게 못된 짓을 일삼는 강간범?'어느 쪽이든 만나선 안 될 사람들이라는 것엔 틀림없었다.'여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들만은 절대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부스럭부스럭.'또 같은 소리가 났다.'“누…… 누…… 누구…….”'무서움에 목소리까지 떨렸다. '부스럭부스럭.'“누구세요?”'여인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우에옹, 우에옹.”'꼭 아기가 날카롭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곧 그 울음소리를 내는 상대를 확인하고 픽하고 웃고 말았다.'“뭐야! 고양이잖아!”'발정이 난 고양이는 꼭 아기 울음소리를 냈다. 여인은 킥 하고 웃고는 떨리던 가슴을 진정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러니 이제 그만 무서워해도 되는 것이었다.'여인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조금 저만치 보이는 집을 향해 더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하며 걷기 시작했다.'“읍!”'차가운 가죽장갑이 입을 가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커진 눈앞에 얼음처럼 차갑게 웃는 남자의 입술이 보였다.'“안녕, 내 사랑.”'눈앞에 날카로운 칼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우리 예쁜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지. 그건 나쁜 짓이야. 그런 나쁜 짓은 벌을 받아야 해.”'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읍, 읍, 읍.”'“내 사랑, 안녕!”'“읍…….”'순간 온 사방에 검붉은 피가 뿌려졌다. 여인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차가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낄낄낄낄.”'남자의 입에서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이에 더러워졌네.”'남자는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얀 원피스에 피 묻은 칼을 닦아냈다. 그리곤 죽어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칼로 잘라냈다. '“내 사랑, 이건 우리 사랑의 증표로 잘 간직할게. 잘 있어.”'남자는 장갑 낀 손으로 죽어 있는 여자의 볼을 매만진 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유유히 사라져갔다.''“악!”'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난 예아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목을 살폈다. '괜찮다. 괜찮았다. '꿈이라는 것은 알지만, 목으로 베고 지나가던 날카로운 금속의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단순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예아는 자신이 꾼 꿈이 꼭 현실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닐 것이다. 설마…….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지만, 예아는 모른 척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아닌 거 알잖아.)'방문을 열고 나가, 주방으로 간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냈다.'(진짜로 그 여자 죽었어.)'“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예아는 아무도 없는 빈 허공에 소리를 치고 컵에 물을 따랐다.'(신고해.)'“넌 내가 그렇게 미친년 소리 듣는 것이 좋아?”'(미쳤잖아. 너 미쳤어.)'“너만 아니면 난 안 미쳤어.”'물을 벌컥벌컥 마신 예아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컵을 식탁에 내려놓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불쌍해.)'“난 내가 더 불쌍해.”'예아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이렇게 소리쳤다.'(또 죽일 거야. 난 알 수 있어.)'“경찰이 잡을 거야.”'(못 잡아.)'“내 일 아니야.”'예아는 차갑게 말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도울 수 있잖아.)'그녀는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말든 그냥 눈을 감았다. '(넌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사람이 어떻게 그래? 나 같으면 안 그런다.)'“그럼 네가 가서 신고해.”'(미친년아! 나 귀신이잖아! 귀신이 어떻게 신고하니?)'예아는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그래! 너 귀신이야. 귀신이니까 이제 그만 좀 올라가!” '(누군 안 가고 싶어서 이러고 있냐? 어떻게 마음 아픈 소리만 골라서 해. 듣는 사람 생각 좀 해 줘야지.)'“사람?”'(아니 귀신!)'예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베개를 베고 누웠다.'“말해 봤자, 내가 살인범 취급당할 거라고.” '(하긴. 그래도 그 여자 불쌍하다. 그리고 그 무서운 남자, 또 그럴 거야. 그건 무서운 거잖아.)'“난 경찰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아직까지 목이 이상해. 무서워 죽겠어.”'(그러니까.)'처녀귀신. 예아는 이 귀신을 나비라고 불렀다. 제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달라는 의미에서 나비라고 불렀는데, 나비는 그녀에게 떨어져 날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근 10년 동안 옆에서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중이었다.'예아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무당, 영매, 귀신 들린 사람. 이 모든 것이 자신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진짜 모른 척 할 거야?) '“난 모르는 거야.”'(비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