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라고 내가 어디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참 우울하다. 주말까지 이 시골에 처박혀서 이게 뭔 꼴이야, 진짜. 쉬는 날 누가 온다고 숙직을 서래? 얼른 광주로 나가야지, 도저히 여기 답답해서 못 있겠어. 아, 진짜 심심해 죽겠네.”'수진은 심심하다 못해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들어 줄 사람 하나 없는 빈 사무실이라 그런지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아 더욱 우울하다.'“진짜 귀찮은 민원 전화라도 받고 싶다. 어떻게 민원 전화도 한 통 안 와? 그냥 확 휴대폰으로 돌려놓고 들어가 버려? 아니지. 그랬다가 운 나쁘게 걸리는 날에는……. 아, 진짜 짜증나. 이게 뭐냐고. 적어도 광주는 주말 숙직은 없었는데 어떻게 여긴 여자한테 숙직이 다 뭐야. 그것도 주부는 다 빼 주고 싱글은 숙직 서도 된다는 건 무슨 심보냐고. 싱글은 이래저래 다 손해야. 진짜 광주로 얼른 가고 싶다. 누가 위에서 나 안 땡겨 주나?”'광주에서 강진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싶어 별 걱정 없이 이곳으로 내려왔다. 설마하니 2년을 못 버틸까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불과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바뀌었다. 지금은 단 하루라도 빨리 광주로 가고 싶을 뿐이다. '이건 인천에서 광주로 발령받아 초기에 적응 못하던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인천은 동기들도 있고 또래가 많아서 일하며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광주로 내려왔더니 또래를 찾기가 힘들었다. 두어 살 차이의 언니들조차 흔치 않았다. 아니, 두어 살 차이의 언니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인지 수진과 어울려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인천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만 하는 되는 분위기였지만, 광주는 아직까지 관료주의적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윗사람 눈치도 봐야 하다 보니 그녀가 원해서 광주로 내려왔다지만 인천이 그리울 정도였다. 물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서 적응했지만 말이다.'인천에서 광주로 발령받아 내려온 게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광주에서 강진으로 온 것은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승진이라는 전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수진의 기분으로는 솔직히 승진이고 뭐고 다시 다 물리고 싶을 정도다. 아니, 왜 승진했다고 전라남도로 나가야 하냐고. 광주에 세무서가 몇 갠데. '수진은 입으로는 신세한탄을, 손으로는 분노의 클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료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터넷마저 느린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주말 숙직도 모자라 한 페이지 넘어가는 데 대략 1분은 걸리는 컴퓨터라니. 이제 지쳐서 아이쇼핑도 못 하겠다.'“일하다 말고 인터넷하며 놀까 봐 일부러 이렇게 느리게 한 거 아냐? 시골이라 인터넷도 이렇게 느린 거냐고? 에고, 속 터져. 하긴 그래도 광주는 도시였지. 언니가 광주 내려가면 힘들 거라고 웬만하면 인천 있으라고 할 때 그냥 있는 거였어. 괜히 혼자서도 잘 사는 엄마 걱정을 사서 해서는……. 누굴 탓하겠어? 내가 내 발등 찍었는데. 그래도 광주는 이 정돈 아니었다, 뭐.”'어째 오늘은 눈에 들어오는 물건 하나 없다. 이럴 때는 인터넷 쇼핑으로 뭐든 하나 질러 줘야 이 답답함이 가실 텐데. 오늘은 뭐든 되는 게 없는 날인 모양이다. '“5년 동안 자취 생활 신물 났었잖아. 광주로 내려와서 엄마가 해 준 밥 먹고 엄마가 빨래도 해 주고, 뭐 좋은 점 많았지. 그런데 여긴 뭐냐고. 후배랑 같이 방 써야 하는 데다 놀거리도 없잖아. 영화 보러 목포까지 가야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이런 시골에선 정말 단 하루도 더 못 있겠다고. 내가 비록 생긴 건 시골스럽지만 안은 뼛속까지 도시 여자거든? 여기선 도저히 못 살아.” '혼자이니 뭔 짓을 못할까. 버럭 소리라도 지르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수진은 혹시나 자신의 말을 들었을까 싶어 서둘러 번쩍 들린 손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물론 속으론 가슴이 쿵쾅거려 정신이 없었지만― 최대한 단정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살폈다. '사무실에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지섭이었다. 유부남이 되고도 남을 나이에 여전히 총각인 것도 모자라 국세청에서 잘나가던 사람이 굳이 이 시골에 처박혀 있는 이유조차 알려지지 않은 해남 세무서 강진 지서의 미스터리 인물이 바로 진지섭 지서장(支署長)이다. '그의 나이가 서른아홉이라는 말을 들으면 다들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 하는 표정을 지을 정도로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마스크의 소유자. 그녀의 둘째 오빠가 서른일곱인데 그 오빠에게도 붙어 있는 두둑한 뱃살조차 없는 지서장은 오빠보다도 훨씬 탄탄한 몸에 얼굴도 더 어려 보였다. '그녀의 형부보다는 작아 보이지만 오빠들보단 커 보이는 걸로 봐서는 대략 175센티미터 정도나 되려나. 뭐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딱 모범생 스타일로 생긴 지서장은 초기엔 여직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나이가 좀 많은 게 흠이지만 깔끔하면서도 준수한 외모에, 안정적인 직업으로 경제력도 갖춘 그를 두고 여직원들 사이에 신경전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물론 그때도 수진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헛물켜는 여직원들이 좀 우습긴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세무서 직원들 간의 단합을 과하게 강조해 금세 여직원들의 눈 밖에 났지만 뭐, 그 정도면 어디 내놔도 나쁘지 않을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그 나이 먹도록 솔로라는 사실이 미스터리일 뿐이다. 물론 주말에 갑자기 세무서로 들이닥친 것도.'‘아니, 주말 당직 설 이유가 없는 지서장이 여긴 무슨 일로 왔을까? 혹시 나 당직 잘 서나 감시하러 온 거야? 아, 진짜. 이 아저씨는 잘나가다 한 번씩 꼭 저러더라. 이러니 좋아해 줄 수가 없어, 내가.’'“안녕하세요, 지서장님.”'수진은 그녀의 속마음이 얼굴로 드러날세라 표정에 신경을 쓰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수진도 안다. 그녀의 속마음이 표정으로 잘 드러난다는 것을. 지금도 영 내켜 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을까 봐 수진은 조마조마했다. '그런 수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섭은 수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지서장의 사무실은 2층. 그런데 굳이 1층에 들어와 그녀의 앞으로 온다는 건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제발 그게 일과 관련된 게 아니기를. 주말 숙직 서는 것도 모자라 여기에 일까지 더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오늘 숙직, 수진 씹니까?”'‘저니까 제가 여기 있겠죠. 당연한 걸 왜 물으세요. 그런 거 물으려고 오신 거면 어서 가세요!’'그러나 수진은 사회생활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으로 하고 입으로는 공손하게 답했다.'“네. 지서장님은 어쩐 일이세요?”'“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지나는 길에 그냥 들렀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다시 오느니 온 김에 사택으로 들어가려구요.”'“아, 그러세요. 그럼.”'‘좋겠다. 누군 지서장이라 주말 숙직도 안 서는데 일이 있어 왔다가 그냥 들렀다고? 누구 약 올려? 암튼 나랑은 진짜 안 맞아. 왔으면 그냥 자기 사택으로나 갈 것이지, 뭐 하러 와서 약을 올리는 거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아저씨 보기 싫어서 얼른 광주로 가고 싶거든?’'사실 수진이 처음부터 지서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솔직히 이런 시골의 지서장으로 있기엔 이 정도면 아까운 외모다. 내일모레면 마흔이다. 보통 그 나이면 지나친 음주와 흡연으로 뱃살도 두둑해지고 얼굴색도 검게 변할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멀끔한 인상에 일 처리 깔끔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공정해 상사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그런 평가는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이곳 직원들의 근무시간은 원래 오전 9시부터 6시까지다. 하지만 누가 시골이라고 일이 없다고 했나? 이건 시골이라 한번 외근 나가면 이곳저곳에 펼쳐진 섬까지 찾아 들어가야 해서 일이 더 많다. '아무튼 근무시간 내 주어진 일을 끝내 자유이고 싶은 게 직원들의 마음일 텐데, 지서장은 틈만 나면 직원들이 모두 모여 함께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좋아할까. '어느 날 그는 햇볕도 따뜻하고 좋으니 산책이나 하자며 막 점심을 먹은 직원들을 모두 끌고 세무서 뒷산을 올랐다. 물론 지서장이 그들의 목에 줄을 걸어 끌고 간 건 아니지만, 감히 지서장 말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을까? 봄기운이 완연했던 날부터 더워질 때까지 무려 두 달 동안, 그들은 점심시간 뒤 매일 세무서 뒷산에 올라야 했다.'여름이 되니 다행히 더 이상 산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채 일주일도 가기 전에 지서장은 이번엔 퇴근 후 배드민턴을 치자고 했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떨어지니 6시라고 해도 밖은 대낮처럼 환했다. 멀리 출퇴근하는 직원들은 퇴근을 이유로 빠졌고, 남은 건 사택 생활을 하는 직원들과 지서장뿐이었다. 결국 여름부터 찬바람이 불 때까지 그들은 열심히 배드민턴을 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