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걸어가자 보이는 것은 해질 무렵이 되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 유리의 성. 유리의 성? 아, 황태자전하의 궁이구나. 언제 여기까지 오게 됐지? 길을 익히면서 돌아다녔을 때는 일부러 이쪽은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그때와 같은 하얀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꽃밭. 그리고 그 위에는 황금빛의 머리칼. 황금빛의 머리칼? 낯설지가 않아도 너무 낯설지가 않다? 설마하고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누구냐.”'그때의 미성과는 다른 남자다운 허스키한 목소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금발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누구냐고 물었다.”'세일리안 제국의 황태자의 외모를 대륙에서 손꼽는다는 이야기는 수련에 파묻혀 살았던 나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왔었다. 그저 남자의 외형이 아름다우면 얼마나 아름다울까하고 어릴 때엔 어려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며 콧방귀만 뀌며 넘겨왔었는데, 고개를 완전히 돌려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말에 심히 동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빛나는 금발과 그 위에 마치 별 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금빛의 머리칼 중간 중간 빛나는 은빛, 두 가지 색깔을 아름답게 머금은 신기한 머리색. 그리고 그 색과 비슷한 눈동자 색, 날카로운 콧날과 얼굴선은 십여 년 전 곱기만 했던 소년을 매력적인 남자로 보이게 했다. 다만 그때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여전히 새하얀 피부와 새빨간 그의 입술. 두 번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자, 그는 친히 나른해 보이는 몸을 일으켜 보기만 해도 섬뜩한 날을 가진 검을 스르르 뽑아 나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잠시만요.”'내가 두 번이나 대답하지 않은 걸 복수라도 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는 그 날카로운 검을 내 목으로 가져다 대었다. 어째, 이 상황을 겪었던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인 건가?'“네가 누군지 신분을 확실히 밝히도록 해라. 내 시간을 방해한 무례한 녀석아.”'“아, 저는.”'우물쭈물거리자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을 살짝 눌렀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과 대조되는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황태자.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여 칼날을 피하곤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인사가 늦었습니다. 얼마 전 샤일의 이름을 받은 스윈 제이윌르 샤일입니다.”'일부러 칼날을 피하도록 가만히 둔 것이었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 고운 미간을 구긴 채 검을 거두고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오호? 아들이 아니라 계집애였나?”'계, 계집애. 고개를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황태자는 금방 싫증이 났는지 몸을 홱 돌려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계속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다시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계집애의 호위 따위는 필요 없어, 계집애는 잠자리에서나 필요하지 검을 들고 설칠 필요는 없어.”'매력적인 목소리를 귓가에 흩뿌리고는 킥킥대며 사라지는 황태자.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있던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궁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옷만 갈아입은 후 뒷마당으로 나가 검을 들고 무작정 휘둘렀다. 검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도 베는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손이 움직이는 데로 휘둘렀다. 화가 났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고 싶어졌다. 한참을 정신없이 검만을 휘두르다 지쳐 명상을 위해 다듬어 놓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일이면 황태자가 황위를 받아 세일리안의 새로운 황제가 되겠지, 그리고 나도 이제부터는 황궁으로 들어가 그 황제를 호위해야 하겠지. 평생.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평생을 그 옆에서 있어야 하는 거라면 불신에 가득 찬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고 싶었다. 그래. 바꾸고야 말 거다.'황제가 즉위한 지 어느새 꽤나 시간이 흘렀다. 갓 샤일의 이름을 받았을 때가 내 나이 열아홉 때의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스물두 살이 되었고 지난 삼 년 동안 황태자도 황제로 즉위해 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나도 샤일의 이름을 정식으로 부여받아 기사단과 모든 것들을 나의 방식대로 잡아가는데 꼬박 삼 년이 걸렸다. 그동안 황제와 대화를 나눈 것이 열손가락 안에 꼽았던 것 같다. 황제도 나를 딱히 부르거나 찾지 않았고, 나는 황제가 있는 곳을 조용히 지키는 일만 했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사단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황제가 있을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 년 동안 한 번의 샤일의 시험이 있었고 그 시험을 보기 좋게 통과한 나는 기사단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아가는 중이었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인정을 받는 정도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할 말이 참 많다. 여자라는 편견이 아무리 애를 써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거더라. 첫 1년 동안은 그래도 기사단장이라고 위엄이니 뭐니 보여주겠다고 무게를 잡다가 무시만 당했었다, 그렇게 지낸 지 2년째가 되자 나는 기사단장의 위엄이니 뭐니 다 집어 던져버린 지 오래 되었고 같이 훈련을 하면서 구르고 땀을 흘리고 그렇게 서서히 그들 속에 물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3년째 되는 첫 해였다. 요즘 제국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늘 그렇듯 새로운 황제가 즉위함에 따라 익숙해지기 전까지의 그 잠깐의 정체기 동안 주변왕국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곧 동맹을 맺은 몇 개의 왕국이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거라는 소문이 제국에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샤일 경!”'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니 황제의 직무대신인 하스가 나를 급하게 쫓아오고 있었다.'“아, 하스? 오랜만이군요. 어쩐 일이시죠?”'평범한 갈색머리에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스는 꽤 멀리서 뛰어왔는지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하아, 집무실 오는 길이었군, 폐하께서 찾으시네.”'“폐하께서?”'하스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좀처럼 많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그래, 얼른 가자고. 급한 일이네.”'정말 급한 일인지 숨을 고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내 손목을 잡아끌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3년 만에 폐하의 부름이라. ''''황궁에 들어오고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없이 보았던 집무실이었지만 그 안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늘 밖에 서있기만 했었으니까. 하스가 조심스레 노크를 하자 작은 대답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집무실에 보기만 해도 질리는 양의 서류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리고 그 서류더미들 사이에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폐하 샤일 경을 모셔 왔습니다.”'“하스, 나가봐도 좋아.”'여전히 딱딱한 황제의 목소리. 하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조용히 방을 나갔고, 남은 황제와 나 사이에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색한 팔을 가지런히 뒤로 한 채 시선을 약간 내리깔고 서있었다.'“벌써 시간이 꽤 흘렀군.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나.” “전 샤일입니다.”'그리고 제가 머물 곳은, 황제의 곁입니다.'비꼬는 말투에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황제가 인정하지 않는 샤일도 있나?”'“…….”'“뭐 아무려면, 케일 왕국을 알고 있나.”'“네.”'“주위의 크고 작은 왕국들과 연맹을 맺어 케일 연합군을 형성했다, 알고는 있겠지?”'“네.”'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일 때문에 내가 먼저 황제에게 청을 했어야 됐을지도 몰랐으니까. 이렇게 먼저 부른 게 좋은 의미는 아닐지라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서는 내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말하는 황제가 너무 야속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그들이 감히 제국을 칠 생각을 품고 있어, 왜 그럴까?”'황제의 입이 열리는 게 무서웠다.'“왜 그딴 조무래기들이 대(大)세일리안 제국을 칠 생각을 했을까?”'“…….”'“이번 샤일은 꿀 먹은 벙어리인가? 몰라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건가?”'차가운 황제의 목소리가 스윈은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스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황제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윈의 앞으로 다가왔다. 살짝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본 스윈은 티 나지 않게 숨을 멈췄다. 제대로 보지 못한 사이 더 매력적인 그의 모습에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의 바탕이 우리 샤일기사단이야. 샤일기사단의 명성에 같은 제국조차도 함부로 덤빌 생각도 못하지. 근데 왜 그딴 녀석들이 건방진 생각을 품게 됐을까.”'황제는 다가와 스윈의 옆에 있는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탁자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황제의 분노에 스윈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어디서 튀어나온 지도 모르는 어린 여자가 샤일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었다는 것 때문이지. 이제 샤일 기사단이 제대로 구멍이 났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하나로 흐르듯이 묶은 긴 머리를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한번 슥 쓸어보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박박 닦았다.'“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제1기사단과 제2기사단 두 기사단을 이끌고 세단왕국의 수도를 쳐. 그 왕국이 벌레들의 소굴이니. 완벽하게 처리를 하고 온다면 널 인정해 주지, 더불어 여자로써 매력이 없는 너를 예뻐해 주겠다, 그걸 원하는 거지?”'차갑게 비웃은 황제는 차가운 바람을 남기며 집무실을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너무 힘들어요. 아버지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요? 저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닌 것 같아요. 하, 황제에게 거부당하는 샤일이라. 저는 샤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사례가 있었다는 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걸요? 자신을 믿는다며 선황과 함께 훌쩍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괜히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