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곤한 하루였다. 제천에 준공 중인 제3공장에 불이 나 이른 새벽부터 그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이번에 준공하는 공장은 동혁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소방시설을 완비하고 만약을 대비하여 경비도 강화시켰다.'이제 막 건물을 세우고 중요 기계들이 들어갈 준비를 하던 곳에 불이 날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자본이 꽤 들어간 지금 조금이라도 늦게 불길을 잡았더라면 그로서도 꽤 난감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들과 소방관들의 발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갇혀 있던 인부 세 명이 연기로 인해 질식사를 했다는 소식에 동혁은 수습을 하느라 동분서주했다.'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아직도 옷에서 화재의 잔재인 연기냄새가 나는 것 같아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경제인 모임이 있는 호텔을 향했다. 부부 동반 자리였지만 현정은 영화 오디션이 있다며 거부했기에 오늘도 그는 혼자 이 모임에 나섰다. '아버지도 간만에 얼굴을 보인 자리니 굳이 그가 없어도 상관없으리라 여기며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나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잡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인사를 하는 자리가 지겨워진 동혁은 슬그머니 비켜나 호텔의 맨 위층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서울의 야경을 즐기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익숙한 야경이었다. 사실 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보다 그의 사무실에서 보는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미련 없이 바에 앉은 그가 위스키 잔을 기울이던 그때,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창가에 홀로 앉아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낯이 익다. 멋없이 틀어 올린 머리에 아무렇게나 찔러 꽂은 핀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염색기 없는 검은 머리를 돋보이게 했다.'그녀도 그만큼이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느슨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좁은 어깨에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깔끔한 투피스 정장의 치마 선이 보기 좋은 종아리 선으로 이어져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짙은 외로움의 향기가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여자임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는 갈증을 느끼게 한다.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뺨에 대고는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시선을 잡았다. 검은 머릿결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얀 살결로 인해 그녀의 손가락이 두드러져 보이는지도 몰랐다. '점점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는 기억을 헤집듯 익숙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지며 순간 그녀에게 말이나 걸어 볼까 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동혁의 바람이 통했음인지 마치 인형같이 움직임이 없던 그녀가 천천히 팔을 움직여 시계를 확인했다. 더불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누군가 기다리는 걸까? 애인? 남편? '갑자기 그녀가 혼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모르는 여자가 아니던가. 처음 보는 여자가 혼자이든 유부녀이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가만히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나 그를 향해 섰을 때, 동혁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익숙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얼굴.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4년을 그의 아내로 살았던 여자인데. 헤어지고 4년 만에 동혁은 이혼한 전처를 만났다.'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동혁은 생전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알은체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체해야 하는 걸까? '4년을 같이 살았다지만 남남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 그녀였다. 잠시 그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사라진. 그녀와의 조우에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를 알아보고 놀란 듯 커다래진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아, 이 여자의 눈이 이렇게 올곧았구나. '4년을 아내로 살았던 그녀의 눈을 그는 오늘 처음으로 바로 보았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때문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돋보이며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 여자가 이토록 예뻤던가? '기억속의 전처는 항상 움츠리고 겁먹은 생쥐 같았는데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어디에도 그런 모습이 없었다. 약간은 창백한 안색이지만 그건 생각지 않은 만남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리라.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선의 몸매가 회색 투피스로 인해 딱딱해 보일 수도 있는 맵시를 살려주었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달걀모양의 얼굴을 따라 아름다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여자지만 처음 보는 듯 낯선 여자 같았다. '동혁을 알아보고 망설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작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입술을 사려 문 것이 보였다.'이제 그녀를 알아보았으니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4년 동안 아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던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로 첫 마디를 건네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의 고민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그녀 덕분에 끝낼 수 있었다.'“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우연히도 만나네요.”'이 여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고 그윽했구나. 침착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동혁이 생각한 것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이었다. '“귀국한 건가?”'간신히 제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감사하며 동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완전히는 아니지만.”'“좀 앉지.”'“아니요, 다음에요. 좀 피곤해서요.”'그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오랜만에 보는 놀라움도, 또는 반가움도 없는. 하긴 그녀가 그를 반가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녀의 거부에 오기 비슷하게 잡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음이 있을까? 앉아.”'분명 부탁하려 했는데 버릇처럼 엄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잠시 지우의 눈가에 어이없다는 듯한 기색이 어렸지만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순순히 옆자리에 앉았다. 지우가 앉자 눈치 빠른 바텐더가 그녀의 앞에 새로운 잔을 놓아주었고, 동혁은 묻지도 않고 마시고 있던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말없이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그녀가 다시 낮은 한숨을 내쉰다. 꽤나 귀찮다는 듯. '왜 그런 그녀의 행동에 화가 치미는 것일까? '예전에는 지우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던 그였다. 오히려 반응을 보일라치면 차갑게 무시했었다.'“마셔.”'“전 술은 안 해요.”'그랬던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좋아 보이는군.”'“당신도요.”'“언제 온 거야?”'“삼 일 전에요.”'“연락하지 그랬어.”'“왜요?”'그녀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 끊어진 인연인데 굳이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막상 지우를 붙잡아 앉혔지만 할 말 또한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도 싫었다. '“당신 부모님은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