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아아, 아까워. 이렇게 아까울 데를 봤나. 정말 아무리 봐도 잘하는 짓이 아니라니까. 문혁이 이걸 보면 날 잡아 죽이려고 했을지 몰라. 너 안 말렸다고.”'“문혁이라니, 또 그 버릇. 혁이 오빠라고 부르랬잖아.”'“네, 네. 알았습니다. 다은 아가씨. 암튼 그쪽의 그 대단한 혁이 오라버니께서 지금 네 꼴을 보면 애꿎은 나를 탓할 거란 말이야. 착한 애를 망쳐 놨다고.”'“망치다니. 겨우 머리 자르는 걸 가지고 과장은.”'“나한텐 그까짓 머리지만 너한텐 겨우 머리가 아니지. 오년간 애지중지 하면서 온갖 정성은 다 들여서 기른 머리잖아. 세상에, 정말 섬뜩해. 네 머리 한 가닥이 잘릴 때마다 내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 좀 봐.”'“맙소사. 누가 권민아를 말리겠어. 너는 아무래도 연극계로 들어서야 할 운명인가 봐. 잘하면 내 잘린 머리 다발을 쥐고 시라도 읊겠다.”'“못할 건 또 뭐야. 잠깐만 기다려 봐. 적당한 게 떠오르면 읊어 줄 테니까.”' 옆에서 염색중인 민아가 정말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걸 거울을 통해서 보면서 다은은 쿡쿡하고 소리를 삼키며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헤어 디자이너의 가위질이 거듭되면서 그녀의 긴 머리는 차츰 차츰 짧아져 간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들 사이로 아직도 허리까지 닿을 듯한 긴 머리카락 한 가닥이 보였다. 어쩐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다은의 눈이 그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디자이너가 빗을 들어 남은 그 머리마저 빗어 올렸다. 그리고 싹둑, 싹둑 가위질 두 번에 그나마 가장 길었던 머리가 절반이상 잘려 나갔다. '“하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한숨에 끼어들 듯이 옆에서 민아가 말했다.'“거 봐. 후회할 거랬잖아. 머리는 아무 때나 자르는 게 아니야. 나같이 긴 머리를 주체 못하는 녀석들이나 시시때때로 자르는 거지, 너같은 애가 갑자기 그렇게 잘라버리면 충격먹는다구.”'“충격까지는 아니야. 그냥 낯설어서 그래. 나, 이렇게 짧은 머리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처음이라구. 근데 머리가 시원해서 좋긴 하다.”'“퍽이나 좋겠다. 지금 표정 봐서는 울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아, 나 그럴 듯한 시가 떠올랐어. 들려줄까?”'“정말로 시를 읊게? 여기서?”' 다은이 자신의 뒤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디자이너와 스텝들을 쳐다보며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했지만 민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대답했다.'“수다를 떠는 거나 시 읊는 거나. 거기서 거기지. 언니, 고상한 시 하나 읊을 건데 창조활동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좋은 시라면 도움이 되겠죠.”' 디자이너가 웃으면서 민아의 말을 받아치자 민아는 거 보란 듯이 웃으며 다은에게 혀를 내밀었다. 역시 권민아가 하고 싶은 일을 말려봤자 득보다는 실이 많다. 다은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민아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니 이내 민아는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시작했다.'“자, 백석 시인의 여승(女僧)을 읊어 주지.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