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열렸다. 맹수의 몸짓을 연상케 하는 중년 남자의 어깨를 발견한 재헌이 지은의 손을 놓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아!”' 분기탱천한 얼굴로 재헌을 노려보던 유 회장의 표정이 급하게 구겨졌다. 재헌의 등 뒤로 보이는 환자복을 입은 딸의 보기 흉한 얼굴이 유 회장의 숨소리를 격하게 만들었다.' 자줏빛 멍이 심하게 얼룩진,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저 얼굴이 내 딸이란 말인가. 순식간에 분노를 상실한 유 회장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선 비서실장이 헉 소리를 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 지은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딸의 침대를 향해 달려간 진숙이 격한 울음을 토했다. 상한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딸의 목과 가슴에 주먹만 한 멍울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자, 진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작아질 줄 모르는 어머니의 오열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들을 향해 다그치듯 묻는 유 회장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었다. 묻어두고 지낸 것만으로도 억울한 시간들. 재헌이 듣는 앞에서 새삼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선주는 지은의 아픔이 일회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진작 알았어야 했을 일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선주의 입술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늘처럼 외적으로 드러난 폭행은 처음이지만, 유지은 환자가 결혼 생활 내내 받은 폭행은 지금 보시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진숙이 선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꽂혀드는 유 회장의 표정을 선주는 놓치지 않았다.' “지난 2년여 시간의 진료 기록을 보시면, 유지은 씨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지은아, 이게 무슨 소리냐? 흑흑흑…….”' 유 회장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은을 향해 걸어갔다. 보자기에 동여맨 보석처럼 부은 눈두덩이 속에서 짚어지는 가냘픈 빛이 아마도 딸의 눈동자인 것 같았다. 무참하게 부어오른 콧잔등과 누군가 흙을 빚어 성의 없이 붙여 놓은 것 같은 흉한 입술이 그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휴…….”' 안쓰럽게 짚어지는 딸의 눈동자를 가늠한 유 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지낸 잔인한 기억 하나가 인화된 사진처럼 그의 눈을 채웠다.''' 아홉 살이 많던 누이는 그에게 있어 또 한 분의 어머니였고 그를 살게 만든 세상이었다.' 어머니가 누이가 혼례를 치르게 되면, 둘 다 그 헛헛함을 어떻게 할 거냐며 이른 걱정을 할 정도로 의가 각별하던 남매였다.' 온 나라가 전쟁 중이라고는 했지만, 궁핍한 중에도 때마다 감자며 옥수수를 삶아주던 누이 덕분에 사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지내던 때였다.' 버선발로 달려 나가던 어머니의 뒤를 무작정 따라나선 날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어머니가 달려간 곳은 집성촌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타나는 문둥병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그 동네에 가면 문둥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간을 빼 먹는다는 누이의 무서운 말에,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웠던 곳. 여덟 살의 어린 소년은 어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목을 놓아 우는 순간에도, 절대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던 누이의 말이 떠올라, 가정 덩치가 좋은 동네 남자의 팔목을 부서져라 잡고 서 있었다.' 피난 삼아 여기저기서 모여든 이들 중에 불량배들이 흉한 짓을 하고는 그곳에 내다버린 모양이라고, 수군대는 어른들의 소리가 어린 만호의 귀에 들려왔다. 절반쯤 걷어진 거적 사이로 언뜻 누이의 옷이 보인 것 같은 순간, 소년은 어머니가 목을 놓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머니는 덮고 있던 거적 사이로 드러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향해 한없이 누이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지는 배꽃도 그보다는 덜 아름답다던 동네 어른들의 말처럼, 누이의 얼굴은 화사했다. 그런 누이의 얼굴은 누군가 칠해 놓은 듯 붉은 얼룩으로 빈틈이 없었고, 한없이 부어오르고 으깨진 입술 사이엔 엉겨 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머리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봉분 하나 없이 동네 뒷산에 평평하게 묻힌 누이. 반세기가 지났으나 여전히 가슴에 묻힌 채, 잊혀지지 않는 누이의 마지막 모습을 누군가 그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긴 시간을 견뎌온 고통이 가슴을 후비고 들었다. 묵묵히 지은의 손을 잡은 유 회장의 눈가에 소리 없는 눈물이 고여 들었다.''' “아버지…….”' 유 회장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에 지은이 메인 목소리로 입을 뗐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더 이상 말을 잇는 게 버거운 듯, 유 회장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훔치며 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 창백하다 못해 노란기가 흐르는 유 회장의 안색을 살피던 지성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걸음이 휘청하는가 싶더니, 이내 쿵 소리를 내며 유 회장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아버지.”' “회장님.”' 비틀거리는 유 회장의 어깨를 근처에 서 있던 재헌이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찮네. 자네가…… 재헌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