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단축수업을 했기에, 일찍 학교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집으로 온 유나는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 하며 옷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 요즘 들어 그녀는 부쩍 세준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어른으로 보이고 싶었고, 그의 눈에 꼬맹이가 아닌 여자로 비춰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구석구석 옷들을 헤집어 보아도 어른스럽게 보일만한 건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여성스러운 옷들이야 몇 벌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영 마음에 안 찼다. '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 바로 엄마 옷 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다 보니 여러 가지 세련된 옷들이 많았고, 키가 아담한 편인데다 날씬했기 때문에 유나와 옷 사이즈도 큰 차이가 없었다. ' 그래, 어차피 집에 잘 오시지도 않는데 오늘 하루만 적당한 걸로 빌려 입고 가 볼까? ' 안방으로 가기 위해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던 유나는 문 옆에 걸려 있는 전신거울을 보다가 잠시 흠칫 했다. ' 다시 손잡이를 놓고……, 그녀는 거울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꽂아놓은 분홍색 하트 장식의 실핀. 중학생들이나 꽂고 다닐 법한 디자인이다. 분명, 순전히 본인의 취향으로 직접 고른 액세서리인데 말이다. 매끌매끌하니 결 좋고 깔끔하긴 하나, 고데기나 드라이로 손질한 적이 거의 없는 어깨선의 생머리는……, 아무리 봐도 매우 소녀스럽기 짝이 없었다. ' 또 얼굴.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데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볼은 세준이 툭하면 꼬집으며 애기라고 놀려서 그녀의 속을 박박 긁어놓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보더라도 솔직히 19세의 나이보다는 어려보이는 외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몸매. 체형이 마른 편이라 가냘프고 매끈하긴 했지만 볼륨감이 없었다. 한마디로 유아 체형. ' 유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후우……. 이런 내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어른처럼 보일 리가 없잖아.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해. '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옷장으로 가서 평소에 잘 입던 티셔츠와 청치마를 꺼내들었다. 괜히 엄마 옷을 입고 갔다간 ‘나 오늘 엄마 옷 입고 나왔어요.’하고 동네방네 광고하며 다니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안 봐도 우스꽝스러울 게 분명할 테니까. ' 음음. 그런데……, 정말, 그렇게나 안 어울릴까? 실제로 입어 보면 의외로 괜찮을 지도 모르는데……. 흐으음. 밑져야 본전이니,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한번 입어나 볼까. ' 결국 다시 안방으로 향한 유나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의 장롱을 열었다. ' 그리고……. 양손으로 장롱 문을 잡은 채, 한참동안 미동도 없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 그녀의 표정은 싸하게 굳어져 있었다. 온 몸의 피가 순식간에 냉각되는 듯한 싸늘한 느낌이 몰려왔다. 열려진 문을 잡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유나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힘없이 장롱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옆의 침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버렸다. '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자리가 비좁아 옷들이 넘치도록 꽉꽉 들어차 있어야 할 장롱 안은 허무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앉은 채로 천천히 안방 전체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방이 이전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여유 공간이 많고 대체적으로 썰렁하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유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자신의 방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축번호를 꾹 눌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뚜르르― 뚜르르― ' 단조로운 신호음이 계속해서 귀를 찔러 오고, 끝내는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여자의 기계적인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 기운 없이 가방을 챙겨 집 밖으로 나온 유나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준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그녀는 상념에 잠겼다. ' 솔직히 놀랄 것도 없었다. 이혼 서류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언제든 이런 일이 다가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에게 말도 없이 벌써 이혼 수속을 모두 끝냈다고 하더라도 화를 낼 것도, 원망할 것도 없었다. ' 언제부터 그 사람들이 날 신경 썼다고. 언제부터. '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의 아이에 지나지 않을 텐데. 아니, 이젠 그것도 아니라 그냥 이도저도 아닌 관심 밖의 존재일 뿐일 텐데, 왜 그 사람들의 일로 자신은 이렇게나 혼자 상처받고 우울해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답답하고 속이 상했다. 일단 엄마에게 음성 메시지는 남겨 놓았다. 언제 연락이 올진 모르겠지만. ' 버스가 어두운 터널에 들어서자, 창유리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흐릿한 눈동자와 굳게 다물어진 입술. 짓고 있는 표정으로부터 우울함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유나는 양손의 검지로 다물어진 입술을 살짝 치켜 올렸다. ' 웃자, 이유나. 조금만 있으면 선생님을 뵐 텐데……. 선생님께, 못난이처럼 울상인 얼굴 보여드릴 순 없잖아? 그러니까 웃자. 이런 일로 일일이 감정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 괜한 걱정 끼쳐드리는 거……, 어린애 같은 행동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