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벌써 몇 번째나 기획을 다시 짜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었다.'“잘 되가?”'동기인 효주였다. 나이가 같은 탓에 둘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다. 해나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효주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잘 될 거 같아?”'해나는 맞은편의 책상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효주의 시선도 해나가 바라보는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한 손에 종이컵을 든 여자 둘이 히죽대고 있었다.'“가자, 머리 좀 식히러.”'효주는 해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해나는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쾅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효주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소음에 여자들은 수다를 멈추고 해나 쪽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지만, 이미 해나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아, 정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같은 입사 동기인 유나와 지숙은 알아주는 수다꾼들이었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둘은 틈만 나면 모여 쑥덕댔다. 디자인 기획자 김 씨가 이혼녀라느니, 부장과 이 대리가 불륜 사이라느니 하는 소문들은 모두 그네들에게서 나오는 것들이었다.'휴게실의 탁자에 앉은 해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효주는 피식 웃으며 해나 앞에 자판기에서 금방 뽑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앉았다.'“하루 이틀이니?”'효주의 태평한 말에 해나는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너야 통과됐으니 여유 있겠지만, 난 다르다고.”'“이번엔 무슨 건인데?”'“목걸이.”'“어? 너 그거 이미 프레젠테이션 했잖아.”'“젠장, 엎어졌어. 팀장이 상업성이 부족하대.”'해나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벌써 이곳, 한솔기획에 입사한 지 3년, 그녀는 보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이해나 씨는 우리 회사에 지원한 동기가 뭔가요?⌟'⌜아름다움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낱 돌덩이가 되느냐, 화려한 보석이 되느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전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제 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해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대중적인 디자인을 원한다는 팀장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빌어먹을!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때만 해도 뭐라 그랬나. 중요한 것은 상업화가 아니라 창조성이며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그리도 떠들더니, 조금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슬이었다.'“힘들겠다, 다시 하려면.”'효주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나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해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효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픽 웃었다. 해나가 그녀를 바라보자, 효주는 주위를 한 번 확인 한 후 몸을 탁자 앞으로 바싹 당겨 해나에게로 다가갔다.'“참, 소식 들었어?”'“무슨 소식?”'“월요일에 사장 아들 부임한대. 팀장으로 온다는데 우리 팀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어.”'“그래? 그럼 지금 우리 팀장은?”'“모르지, 뭐. 요새 계속 표정 안 좋았잖아. 낙하산한테 밀린 거지.”'“그래?”'해나는 무심히 대꾸하고는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효주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다시 속삭였다.'“근데 소식통에 의하면 사장 아들이 장난이 아니래.”'“유나 씨하고 지숙 씨가 그렇게 신이 났던 이유가 그거였어? 백마 탄 왕자님 행차에 시녀들 엉덩이가 씰룩거리나 보네.”'해나의 비아냥거림에 효주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구미가 안 당기고 배겨? 유학파 출신인데 매너가 죽이는데다 얼굴도 끝장나게 잘 생겼댄다. 결정적인 건 아직 미혼이라는 거지.”'“그렇게 대단해? 나도 한 번 움직여 봐?”'“넌 만나는 사람 있잖아.”'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효주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끝냈어.”'“언제?”'“오늘 출근하기 전에.”'“에, 정말?”'효주는 깜짝 놀랐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해나의 팔을 잡아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 괜찮은 남자였잖아. 얼굴도 반반하고 능력도 있었고.”'“질척거려서.”'말을 마친 해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하이힐이 복도를 울렸다. 효주는 해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저 기집애 데려갈 남자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