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생활은 그나마 그녀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안겨다 주었다. 동경대 근처 오피스텔을 잡아 지금은 열심히 공부 중이었고, 김 실장은 시시때때로 그녀를 살피었다. 임신 6개월. 그나마 복대로 조이고 헐렁한 티를 입으면 마른 체형인지라 그다지 티는 안 났지만, 몸이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 거의 매일이다시피 서울에 전화해 부모님을 안심시켰고, 부모 또한 아무 의심 없이 그녀가 학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희는 작은 복수를 꿈꿨다. 자신의 목숨 같은 사람과 헤어져 그의 아이를 잉태했고,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간다면 그때서야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리라는 생각. 가희는 오피스텔 창문에 기대어 배를 만져 보았다. 그나마 책으로만 통해 알 수 있는 상식이 전부였고, 근처 산부인과를 김 실장 몰래 알아 두어 진료도 두어 번 받아 보았다. 그때마다 남편과 같이 온 부부를 보면서 준태를 생각했다. 고아인 그에게 이 아이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제일 행복했을 그를 생각하니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괸다. 가희는 애써 눈물을 참아 본다. 참고 참아 그를 닮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 ' 임신한 몸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건 그녀의 체력으로 한계가 왔다. 이번 주 김 실장이 올 예정이었다. 얌전히 학업에 충실한 결과 김 실장이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이곳에 들르곤 했다. 이번 주 내로 휴학계를 내려고 마음먹은 순간 갑자기 배에서 아기의 태동이 느껴졌다. 놀란 가희는 입을 막고는 가만히 자신의 배 위로 떨리는 손을 올렸다. 또 한 번 움직인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 “준태 오빠. 아기가 움직인다. 느껴져. 당신 아기가 움직여. 너무 신기하다. 당신… 당신 아기가…살아 움직인다.”' 가희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한참을 뱃속의 아기를 느끼며 준태를 생각했다. '' 김 실장이 찾아온 날, 김 실장의 놀란 얼굴을 가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냉철하고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 “놀라지 마세요. 솔직히 제가 무슨 정신으로 공부하겠다고 동경까지 왔겠어요.”' “아… 아가씨. 이건.”' “맞아요. 준태 오빠 아이예요. 이 아이 지키려고 동경에 온 거예요.”' “이건 무모한 짓입니다.”' “서울에 있었으면 이 아이 분명 지우라고 하셨을 테고, 전 또 그렇게 끌려가 지웠을 거예요.”' “몇 달 됐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해야 돼요.”' “그래서 지난달부터 절 못 오시게 했군요.”' “네, 아무래도 들킬 것 같아서. 혼자 낳으려고도 했지만, 어차피 알려질 일이라면 김 실장님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구요.” ' “아가씨.”' 김 실장은 가희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어린나이에 무모한 생각. 김 실장은 일을 어찌 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아이 낳고 서울로 가야겠죠. 아무래도 여기서 키우기는 힘들 테니까.”' “부모님 생각은 안 하십니까. 어찌 됐든 가희 아가씨를 이 세상에 가장 많이 생각하시는 분들입니다.”' “절 생각하셨다면 그와 갈라놓지 말았어야했어요.”' “아가씨.”' 독기 품은 말투였다. 김 실장은 준태라는 남자를 생각했다. 죽어서도 놓지 않은 끈. 지독한 사랑임에는 틀림없었다. ' “지금이라도 부모님…….”' “아니요. 절대로 말씀드리지 마세요. 아이 낳고 김 실장님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 갈 거예요.”' “하.”' 고집스러운 모습. 예전 중학교 때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고집을 부리면 끝끝내 해내고 마는 얼굴. '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이 뭐죠.”' “다음 달, 동경에 머물러 주세요. 회사 일을 만드시든지 적당히 이유 만드셔서 들어오세요. 김 실장님 뒷감당은 제가 해 드릴 거예요.”' 김 실장이 뒷감당이란 소리에 피식 웃음을 내보이자, 가희의 얼굴이 붉어진다. ' “알…아요. 아직 저에겐 힘이 없다는 걸. 하지만, 두고 보세요. 김 실장님.”'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만 믿죠.”' 김 실장은 오피스텔을 나오면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직 결혼이라는 걸 안 해 본 터라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김 실장은 어려운 숙제라도 받은 사람처럼 이마를 문질렀다. ' “어쩐다. 회장님이 아시면 기절초풍하실 것 같은데…….”' 출산일이 다된 마당에 아기를 지우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럼 일단 그녀의 뜻을 따라 줘야만 하지 않겠는가. 김 실장은 무거운 발길을 공항으로 돌렸다. '' 김 실장은 긴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벌써 들어간 지 5시간째였다. 초산인데다가 어린 나이인 게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 실장은 자신이 태어나서 이렇게 긴장을 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칼부림을 했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 그는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서성대다가 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간째. 그가 분만실 앞으로 가려고 하자, 때마침 의사가 나왔다. 김 실장은 다급히 다가가 의사에게 물었다. ' “산모와 아이는?”' “건강합니다. 그리고 예쁜 공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