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에 서 있는 그의 시선이 오롯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 그녀는 다급하게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손에 들려진 서류철을 가슴에 올려 마치 그를 막아 낼 수 있는 방패라도 되는 듯 꼭 끌어안고는 고개를 들었다. 승냥이처럼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 웃는다. 그녀는 누군가가 가슴을 훑어 내리는 것처럼 싸한 통증을 느끼며, 서류철을 더욱 가슴 쪽으로 당겨 보지만, 이미 그는 그녀의 심장을 야금야금 파먹고 있었다. ' 자신을 늘 불편하게 하는 사람.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파고드는 사람. 깊은 수렁과도 같은 그의 눈길로 그녀를 얽어내고 있었다. ' 복도를 울리는 두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서로 얽히자 그녀는 무심한 척 재빨리 그를 향해 묵례를 하고는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더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내고는 멈춰 서게 했다. 우뚝 선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그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마치 언제 웃었냐는 듯이 아니면 자신이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회사 안에서 얼굴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군.”' “놔…주세요. 사람들 눈이 있습니다.”' 그는 그녀의 팔에서 느껴지는 간헐적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보고 싶었다.”' 그녀의 눈이 이내 커지더니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바쁘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 ‘심장아. 제발 더 이상, 더 이상 그를 향해 뛰지 마라. 그건 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이야. 그를 더 이상 아프게 하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그를 향해 뛰지도, 보지도 마라.’ ' 그녀는 복도의 코너를 막 돌아서서는 몸을 벽에 기대어 가슴에 머금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거대하게 다가서는 그를 그녀는 피해야만 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를 막아서야 했다. 하지만 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없다는 것이 그녀를 암담하게 만든다. 그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한, 결코 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을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곁에 있는 그에게 더 이상 가혹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아픔을 줄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긴 한숨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 그는 그녀가 사라지는 복도 끝을 바라보고는 가늘게 눈을 그었다. 짧은 수염 밑으로 매력적인 그의 입술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 ‘당신은 이미 내 여자였어야 했어. 잠시 늦어진 것뿐이야. 그러니 도망치려고 하지 마. 그럴수록 당신의 피앙세의 숨통만 더 죄어갈 뿐이니까. 서로 그 고통을 맛보자고 한다면 그렇게 해 줄 의향도 있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 '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서리발보다도 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전무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탁자 위로 내민 서류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일수록 좋았다. 쉽고 더 간단하게 그를 옭아맬 수 있으니까. 그는 짙은 눈썹을 모으고는 서류를 당기자 그가 서류봉투를 재빠르게 손바닥으로 누른다. ' “약속은 지키는 거겠지?”'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면 이곳에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의 서늘한 눈빛과 낮은 저음은 사람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나이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전무의 등 뒤에선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 “그래도, 내가 믿을 만한 약조를 해주어야겠네.”' “우리 쪽에서 섭섭지 않게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 “난 이 회사의 사장 자리를 원하네. 애송이에게 이 회사를 넘길 순 없지.”' 사람 욕심이란 끝도 없다. 서류가방 가득 찬 달러도 모자라 사장 자리라. ' “그만한 대가가 되는 서류인지는 보고 말씀드리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저희는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만한 대가는 충분할걸세.”' “알겠습니다. 서류 확인 후 내일쯤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나가자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팔꿈치를 살짝 들고는 검지를 까닥이자, 구석에 서있던 릭이 그의 곁에 섰다. ' “저놈 뒷조사 철저히 해가지고 와. 지금 보기만 해도 여간 구린 게 아니니까. 참, 그리고 성진건설 비서실장은 어떻게 되가는 건가.”' “지금 뒷조사 중입니다. 워낙 회사에 충실한 사람인지라.”' 그가 두 손가락을 마주대고는 미동도 안은 채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 “릭, 나랑 일한지 한두 해가 아니잖나. 내가 두 번 이상 얘기하던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조치 취하겠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서류 손에 넣어.”' 단칼 같은 그의 말에 릭은 바짝 긴장을 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은 사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든 이루어 내는 사람. 그러기에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릭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가 언제 내 손에 들어오겠나. 시간이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심기를 더 건드리기 전에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뜨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미소는 잔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 ‘자, 이제부터 시작인가. 훗.’' J&A그룹의 실무진 중에서도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유일한 동양계 사람. 그것도 한국태생의 남자는 일명 이쪽에선 마이더스이라 칭했다.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다는 마이더스. 그러나 그건 사람들이 듣기 좋게 하는 소리일 뿐, 정작 뒤에서 말하는 그는 죽음의 신 하데스로 통했다. 피조차 얼음같이 차가운 냉혈인간. ' 잘생긴 외모에 탁월한 능력과 샤프한 머리, 동물의 직감처럼 빠른 판단력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가차 없이 잘라내고 파헤쳐 내고도 모자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사람이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