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너는 니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창창하고 젊을 줄 알지? 너 나이 계속 그렇게 먹으면 나중에는 데려갈 사람도 없어. 선 자리 들어올 때 골라서 가. 남자 뭐 특별한 놈 있는 줄 아니? 나 갈 테니까 다 훑어봐, 이것아. 또 지난번처럼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았다간 알아서 해.”' 엄마는 아침부터 잔소리를 있는 데로 늘어놓고 가셨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사진뭉치들을 한참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엄마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것들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가볍게 골인시켰다. 초조한 엄마와는 반대로 나는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불멸이었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감정은 분명 금방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열병에 불과했다. 그런 얄팍한 감정에 사로잡혀 내 인생을 접수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었다. ' “열아, 지금 우리 집으로 올래?”' “지금? 원래 너 아침부터 너희 집 가는 거 싫어하잖아.”' “오기 싫으면 말고.”' “아냐. 지금 갈게.”' 열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텔레비전의 채널을 리모컨으로 돌려댔다. 별로 흥미로운 일이 없는 주말이다. '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이는 나 외에 우리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언젠가 내가 사주었던 파란색의 남방에 노란색의 넥타이를 매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날 발견하고 내 옆에 앉아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그에게는 이 모든 행동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엄마 왔다 갔어.”' “또 선?”' “그렇지 뭐.”'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한테 시집오라니까? 어머님 나 좋아하시잖아.”' “너까지 그러지 마라, 제발. 엄마한테 듣는 것도 지겨워.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야.”' 28살이 되면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내 주위에 너무나 익숙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퇴근할 때 우편함을 열어보면 몇 개나 되는 청첩장이 들어있고, 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결혼 안 하니, 하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왔다. 왜 모두 ‘결혼’이라는 것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남자 하나 때문에 눈물짓기에는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다들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없어질 그 불투명한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일까.' “아, 오늘 나 너무 일찍 일어났어.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꿨는지 아냐?”' “무슨 악몽?”' “아직 12시 안 지났으니까 말 하면 안 돼. 12시 지나면 말해줄게.”' 열이는 어느 새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지독히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 중 하나다. 금세 잠이 들었는지 열이는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 이 남자를 만났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 녀석을 알아온 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열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