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긴 겨울의 끝자락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는 오후, 집 안의 전경前景)은 더욱 따사롭다.''통유리로 된 거실 문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빛이 들어오는 거실 창가에 선 남자는 정원을 마주하고 있다. 반짝이는 까만 머리카락과 긴 목선을 가진 남자는 푸른색 셔츠에 회색 면바지의 가벼운 옷차림이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살짝 찌푸린 남자의 표정만 아니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남자는 유리에 반사된 강한 빛에 눈이 부셔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자 결국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손에 든 서류로 햇빛을 가린 채 다시 자신이 오랫동안 공을 들인 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은은한 노란 빛이 가득한 잔디밭은 깨끗하게 다듬어졌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목련나무는 회색가지에 겨울눈을 매달았다. 풀 한포기 나뭇가지 하나까지 반듯하게 정리된 정원은 만족스럽다. 완벽하다. 확인할 것이 끝난 남자의 찡그린 표정이 스르르 풀린다.'그는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스냅을 이용해 시계를 손목 중심으로 돌린 후 셔츠자락을 말끔히 정리한다. 계획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되어 여유시간이 남은 그는 성취감을 유지할 만한 일을 생각해보았다. 생각이 머리를 다 채우기도 전에 거실 창 왼쪽 벽면을 다 차지한 책장으로 다가선다. 책으로 빼곡한 책장 모퉁이 공간에 마련한 조그만 서랍장에서 하얀색 목장갑을 착용한 후 책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창을 열고 정원으로 연결된 계단을 밟고 섰다. 조용한 공간에서 깨닫는 한 줄의 앎이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법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다시 한 번 집 외관을 훑어보았다.'단아하고 깔끔한 선들로 이루어진 집의 구조는 간결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흠 잡을 데 없는 정원과 반듯한 건물과 집 안팎의 물건들까지, 모두 그의 머리와 손끝에서 나온 결과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결과물을 보는 일은 성취감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에 전념했고 마침내 완벽한 성과를 얻었다. 결과는 만족스럽다.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정원에서 눈을 돌린 그는 정원벤치에 앉아 손에 든 책을 펼쳤다. '‘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한번 볼까?’'그가 뽑아든 책은 여러 번 봐서 낡은 니체의 철학 서적이다. 아무리 많이 보아도 완전한 이해란 것이 없는 책이라 더욱 손이 가는 책이다.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늘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한다. 손 안에 든 책은 읽을 때마다 흥미로웠고 지금 그 흥미를 누리고 싶은 때이다.'[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의 징검다리이지 결코 어떠한 목적도 아니라는데 있다. 인간의 사랑스러운 점은, 그가 하나의 과도기적 존재요, 하나의 몰락이라는데 있다.]'오만하면서도 흠잡을 데 없는 확신이 명쾌한 문장이다. 그는 글이 만들어주는 생각에 만족했다. 앎의 골짜기 사이로 서늘한 깨달음의 바람이 스치자 머릿속이 맑아진다.'형광펜으로 줄을 쳐둔 문장을 읽으며 독서의 유익함과 삶이 주는 여유와 앎을 깨달을 때다. 급격한 어둠이 머리 위를 스치자 글귀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변해 버린 빛의 밝기 때문이다. 만족스럽게 책을 이해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던 그 무렵 어쩐 일인지 빛이 약해지며 읽어 내리는 페이지에 그늘이 졌다. '그는 갑자기 어두워진 빛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하늘을 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머리위에서 눈앞으로 거대한 물체가 휙 지나쳤다. 무엇인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쾅, 쿠다다탕. 우지끈 퍽…….'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정확히 하자면 날벼락보다는 좀 더 무거운 커다란 물체가 그의 머리 위부터 정원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떨어졌다. 큰 굉음이 이어지며 평온함을 유지하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는데 그의 완벽한 정원이 사라졌다. 칼끝같이 단정하게 마름질해놓은 정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하, 이 무슨…….”'그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는 말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누군가가 떨어뜨린 삼단짜리 장롱과 색색으로 펼쳐진 울긋불긋하고 야릇한 속옷들로 인해 정원은 처참한 모양이 되었다. 오랜 공을 들인 정원은 엉망으로 망가져버렸다. 그가 집과 정원에 들인 모든 시간과 정성에 비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그의 귀에 환청처럼 한마디 말이 들렸다. '“미안합니데이~~~.”'그는 낭랑하게 퍼지는 그 메아리 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펼쳐진 속옷들의 출현이 믿어지지 않아 정원과 하늘을 번갈아 보고 또 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벤치에서 일어나 책을 덮으며 책모서리를 모아 잡았지만 납작해지며 접혀야 할 페이지에 이물감이 느껴지며 잘 접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책을 바라보았다. 책을 들어 올리니 저절로 손안에서 펼쳐진다. 열린 페이지에는 코끼리 코모양이 프린트 된 앞이 길쭉하고 동굴처럼 깊게 늘어진 헝겊 쪼가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하얀 목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티 팬티다. 물건의 용도가 인식되는 순간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귀가 붉게 달아오른다. 살면서 한 번도 이성을 잃어 본 적이 없던 그는 잠깐 방심하면 달아날 것 같은 이성의 끝을 잡고 단호하게 외쳤다.'“거기, 속옷장 주인! 당장 뛰어와.”'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 소리쳐 보지 않았기에 쇳소리 석인 기침이 튀어나왔지만 그는 달려오는 사고인 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길, 환자를 만나다. (남자 어느 날 길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