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13월의 연인들 2권 (완결)

세이빙크림을 턱에 바르던 석주는 두통 기운에 얼굴을 찌푸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에 가는 핏발이 서 있었다. 간밤에 몸이 반란한 흔적이었다. '잠자기 전 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다, 안고 싶다, 욕구불만에 예민해진 짐승처럼 구는 그를 혜린은 자장가로 다독였다. 잘 자요. 고운 속삭임에 멋없이 음, 하고 말았지만 사실은 웃고 있었다. 고맙다든가, 행복하다든가 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객쩍어 관둬버렸다. '근사한 말을 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혜린을 놓아 보내기 싫어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골방에서 대마왕을 지켜봤다는 요정이 어찌 되었는지 정말로 궁금하기도 했다. 다 큰 사내의 유치한 호기심이 마음에 들었는지 혜린은 후후 웃었다. 혜린이 잘린 이야기의 끝을 더듬을 때 함께 웃었던 것 같다. 아니, 허허, 소리까지 내가며 분명 웃었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어떤지 알아간다는 것.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요정이 훌쩍거리자 대마왕은 짜증을 냈다고 했던가? 이야기보다 혜린의 음성에 빠져 있는데 하품 소리가 들렸다. 혜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시합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올빼미 체질이라 이른 시각에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 해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혼자 보내는 밤은 적적하고 무거웠다. 혜린과 함께 있고 싶다는 갈망이 의식을 또렷이 밝혔다. 얼굴을 만져주던 작은 손이 그립고 보송보송한 살 냄새가 사무쳤다. 흐벅진 가슴과 보드라운 목덜미가 떠올라 피가 들끓는 것 같기도 했다. 육체의 반란은 감정적 동요보다 훨씬 더 실체적이고 유치했으며 끈질겼다. 결국 입에 대지 않던 위스키를 두 잔이나 거푸 들이켜고 잠을 청했다. 눈을 뜨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혜린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사랑해요, 하는 속삭임을 들은 것도 같고 곤두선 몸으로 뒤척이다 꿈 속에서 혜린을 안은 것도 같았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침 햇살 아래 혼자였다. '석주는 면도날에 뜨뜻한 물을 묻혔다. 크림으로 덮인 턱에 날을 대고 힘을 주는데 쓰라림이 맨살을 갈랐다. 이런. 허연 거품 사이로 가는 핏발이 비쳤다. 면도날을 흐르는 물 아래로 가져가자 날에 묻었던 핏자국이 씻겨나갔다. '혜린아. 넌 내 손길이 싫어질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했지? 성급해도. 거칠어도. 어디서 널 안는다 해도. 그럼 이 손에 피를 묻혔다면? 피범벅이 됐던 손으로 널 만지고 있었다면? 그날의 기억을 무기 삼아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이제는 전부 묻을 거야. 널 어떻게 만났는데. 널 어떻게 얻었는데. 지울 거야. 버릴 거야. 체스를 잃는 일이 있다 해도.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해도.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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