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누워 쉬고 있으면서도 나은은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를 남겨 놓았음에도 답을 해 주지 않는 이현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답도 없는 사람에게 자꾸만 전화를 하려고 하니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 놓고 말았다. '-전화 받으세여-'서희가 녹음해 둔 수신벨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발신자가 킹카 동장이었다. 서희 계집애의 장난으로 저장해 놓은 이현임을 보고 나은은 목소리를 낮춰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예.”'“나야.”'“예. 알아요."'“화났니?”'“아뇨.”'“그래? 화 난 것 같은데…… 아니면 다행이고…… 지금 잠깐 볼래?”'“지금요?”'“안 돼?”'“…….”'“그래…… 그럼 내일보고…….”'“바보. 한 번 더 말하면 어디가 덧나요? 지금 어디예요?”'“집 앞.”'“어디? 우리 집?”'“응. 기다릴게.”'“알았…….”'뚝.'나은이 채 답을 하기도 전에 이현의 전화가 끈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 사람이…… 자기가 뭘 잘했다고…… 웃겨! 나가서 보자고요! 가만두나 봐라!”'나은은 이현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어 올라 대충 옷을 주어 입고 나갔다. 대문을 열고 나가니 대문 앞 계단에 앉아 있는 이현의 모습이 보였다. 검고 긴 그림자와 차가움이 확 밀려오는 공기가 순간 나은을 멈추게 만들었다. 자신이 나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고개조차 들지 않는 이현의 모습에 나은은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은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이현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이봐요! 이현 씨!”'“조금만…… 가만히 있어줄래?”'“어머! 이 사람이…….”'나은은 이현에게 한 소리 하려다 말고 그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이현의 손은 얼음장처럼 그렇게 차가웠다.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은 북극처럼 그렇게 차가왔다.'“나은 씨! 나 있지…… 당신이란 여자와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바보 같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무슨 말 이예요?”'“그냥……오늘은 내말 들어만 줄래?”'“…….”'나은은 이현의 텅 빈 것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나…… 난. 15년 전 쯤 여기서 한 소녀를 봤다. 그리고 첫눈에 그 어린 소녀를 사랑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소녀는 너무나 높은 곳에 있어서 나란 놈이 차마 바라보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난 그걸 잠깐 잊어버렸었어. 그 소녀의 오빠가 내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는 사실로 나도 그와 그 소녀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되는 줄 착각을 했었나봐. 그런데…… 어느 날 오후 내가 떼를 써서 그 소녀를 보러 온 이곳에서 어리석은 나의 욕심 때문에 친구가, 내게 형제와 같았던 그 친구가 내 눈앞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 버렸다.”'이현은 부르르 떨며 잡은 나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나은은 이현의 말이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공명되어 윙윙거렸다.'“그런데 그 친구가 죽고 나서 15년을 애써 참고 살았던 내 앞에 그 소녀가 다시 나타났어. 마치 봄 햇살처럼 환한 웃음과 함께…… 그래도 내가 정신이 있는 놈이었다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말아야 했었는데 내안의 욕심이,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자란 풋사랑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유혹에 지고 말았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꿈이란 것을 꾸게 되었지. 그녀와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녀와 같은 곳을 보며 같이 웃고 울며 늙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오늘 아침 난 알게 되었어. 그녀에게 나란 사람은 절대 용서 할 수도, 용납 될 수도 없는 존재란 것을……. 그래서 이제 내 욕심을 거둬들여야 하는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나란 놈의 욕심은 그녀를 한번만 보고 싶다고 그렇게 속삭여서 그래서…… 이렇게 또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있어. 그냥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면 이유도 모르고 나를 못된 놈이라고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현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나은은 이현의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을 살며시 빼 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은이 아무런 말도 없이 들어가 버린 뒤에도 이현은 그렇게 그 자리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한 자신에게 분노하며, 아니 한번 안아 보지고 못하고 보내버린 자신을 저주하며, 또다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자신을 못된 놈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 잘난 욕심 때문에 그녀에게 진실이라는 어쭙잖은 놈을 보이러 온 자신을 저주하며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그가 떠난 것인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대문 고리를 뒤로 잡은 채 나은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왜 그가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왜 그가 처음 자신에게 마음을 보이지 않고 숨겼는지 알 것 같았다. 금이 오빠의 친구이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 머리와 가슴으로 이름을 지워버린 그 사람이 이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었다. 성당 앞에서 자신을 버려두고 달려가던 이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으려고 매몰차게 대하던 이현, 그리고 오늘 새벽 자신을 태워 주고 한참을 집 앞을 떠날 줄 모르고 있던 이현이…… 대문 밖에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꺼억 꺼억…… 으흐흑……'대문 밖 남자가 울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목구멍으로 다시 삼키며 참으려 애를 쓰는 이현의 울음이 들려왔다. 이현이 울고 있었다. 자신처럼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나오는 울음을 다시 삼키며 그렇게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