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혹 들리는 기침 소리나 재채기 소리 같은 생리 현상에도 미간을 그은 채 시선을 돌리는 살벌한 분위기. 이현도 앞에 놓인 토익 책에 머리를 박은 채 토익 만점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수능 볼 때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 의대를 들어갔을 것이다. '잔뜩 집중한 이현이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던 찰나 갑자기 이현의 뒤에 살며시 다가와 눈을 가리는 손이 있었다. 깜짝 놀란 이현이 공부하던 손길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제 눈을 가린 손을 더듬었다. '앗싸! 남자 손이다.'“누구게?”'눈을 가린 누군가가, 그것도 남자가 ‘누구게’냐 물어왔다. '세상에, 세상에. 아직 서이현 죽지 않았구나. '헌데 도무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혹 제가 잊고 있던 동기 녀석이 군대 갔다 제대를 한 건가? 대강 기억나는 이름을 불러봤다.'“한현준?”'“아니다.”'이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구지? 다시 기억을 떠올려 선배들 중 하나를 짚었다.'“그럼, 준혁 선배?”'“아니다.”'“그럼 누구야!”'참다못한 이현이 버럭 소릴 질렀다.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떼어졌다. 그리고 들려왔다. 다정한 듯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자리 주인.”'헉! 놀란 이현이 돌아보자 웬 모르는 남자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잘생겼다……. '이현이 잔뜩 설렌 얼굴로 바라봤다. 그래. 도서관은 공부만 하라고 있는 곳은 아니지. 청춘의 남녀가 모여 태울 건 학구열만은 아니었다고. '“뭡니까 이게.”'남자가 책상 위를 바라보며 툴툴댔다. '오, 게다가 요즘 트렌드인 차도남 포스인 건가? '이현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어이없다는 말투로 되받아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의 자리서 메뚜기를 뛰려면 적어도 자리 주인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되는 거 아닙니까?”'도서관에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이현을 향해 쏠렸다. 이현이 냉큼 책상 위를 바라봤다. 자리 주인이 공부를 하다 펼쳐 놓고 간 책들이 이현의 책들에 밀려 저만치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자리 주인이라 주장하는 이 남자, 차도남이 아니라 진짜로 화난 거였다. '어머나. 죽고 싶을 만큼 무안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이현이 연신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곤 제 책들을 챙겨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망신, 망신, 개망신. 누구게? 허! '자리 주인과 나눈 그 민망한 대화를 떠올리며 이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아주 그냥 이 학교 도서관에 길이길이 전설로 남겠군.''중략...''하루 종일 흐렸던 날씨였다. 이현이 기숙사로 들어가기 위해 건물을 나서려는 순간 투두둑 빗소리가 이현의 귓가를 때리고 있었다. 어둑해진 하늘.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네.”'이현이 도서관 입구에 서서 손을 뻗은 채 중얼댔다. 찬 기운을 머금은 빗물이 이현의 손 위로 쏟아져 내리자 온몸이 오싹해왔다. '으…… 춥다. 그냥 맞고 가면 감기에 걸릴까? '하지만 이현은 저 빗속을 뚫고 걸어가야만 했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불쑥 누군가가 제 옆에 우산을 씌어 주며 나타나거나 비에 젖은 제가 감기라도 걸려 쓰러져 있을 때 벌끈 안아 병원으로 달리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처량한 신세에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동아리 방 안 와요?”'갑작스런 정우의 목소리에 놀란 이현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언제 와서 서 있었던지 우산을 손에 쥔 채 물끄러미 서 있는 정우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건지. 분명 정우의 손에 들린 우산은 반가운 건데 그 우산을 손에 들고 있는 정우는 딱히……. '이현의 머릿속에 가을 원정을 떠난 바닷가에서 반말로 찍찍 대들어대던 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나는 이 녀석을 반가워해선 안 되는구나.'“내가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려야 할 4학년이란 걸 나만 까먹은 게 아니었나 보네. 모르면 가르쳐 줄까? 나 4학년이다.”'“그래서요?”'“뭐?”'“왜 동아리 방 안 오냐구요.”'“이게 진짜, 여태 말한 걸 귓등으로 들었나. 나 4학년이라고!”'이현이 정우를 비껴 걸음을 내딛었다. 촥! 우산이 펴졌다.'“이거 쓰고 가요. 비 맞지 말고.”'“됐으니까 너나 쓰고 가.”'이현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우가 뒤쫓아 따라와 섰다. 그리곤 이현을 돌려세워 그 손에 우산을 쥐어 줬다.'“쓰고 가라구요.”'그러곤 저는 휙 돌아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현이 다시 정우의 뒤를 쫓아가 우산을 내밀었다.'“필요 없으니까 너나 쓰고 가라고.”'“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내가 네 말 들을 나인 지난 것 같은데.”'“나이, 나이……. 대체 얼마나 먹었냐? 그 나이!”'“뭐? 이게 진짜 미쳤나. 너 죽을래? 하늘같은 선배한테…….”'“그래! 하늘같은 선배니까 비 맞지 말고 가라고. 그래서 우산 주는 거잖아!”''허어. 이게 정말 미쳤구나. '이현은 제 앞에서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새파란 후배를 바라보며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로 쓰라 미루다 결국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우산과 함께 비를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