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크레이지 프린스

“내 인생! my life! 내 방학을 돌려줘!”'젠장, 타이밍도 좋다. 방학에 맞춰 언니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고 형부는 출장을 갔다. 언니 집이 있는 천안으로 내려가 방학을 고스란히 언니의 도우미로 바쳐야 하는 것이다. 언니가 임신한 게 기쁘기는 하지만 나도 내 생활이 필요하다. 내리지 않으려는 나를 터미널 앞에서 떨구어 버린 엄마는 이미 자동차를 타고 멀어진 지 오래였다. 엄마가 일로 한 참 바쁜 시기인 건 안다. 언니의 첫째 딸 지오가 누구나 아는 천방지축이라는 것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까지 이해시키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다.'“마이 라이프으으으으!”'두 팔을 활짝 올린 채 소리를 지르던 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지나쳐 갈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천안으로 내려가는 버스에 올라탔다.''“언니! 나 왔어. 지오야! 이모 왔어.”'“오, 사랑스런 내 동생. 밥은?”'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있는 언니의 불룩 나온 배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언니의 취향이 확실한 호피무늬 소파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지오를 찾으며 소파에 살포시 엉덩이를 붙일 때, 안방 문 앞에서 빼꼼이 얼굴만 내밀고 내 동태를 살피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지오, 안녕? 오랜만이네.”'“김지오. 이모한테 인사 안 할 거야?”'“고새 내 얼굴 잊어버렸나? 지오야. 이모야. 시연 이모.”'“이모?”'그제야 내 앞으로 다가온 지오는 다시금 나를 살펴보다가 다시 제 엄마를 바라봤다.'“너 이모 얼굴도 까먹은 거야?”'“이모?”'“그래. 이모라니까.”'“시연이.”'“시연 이모라고 불러!”'반짝거리는 저 눈빛만큼이나 호기심도 많고 장난기도 넘치는 아이다. 아무리 장난을 쳐대도 마지막에 지어주는 저 예쁜 미소엔 언제나 져줄 수밖에 없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느끼며 지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이모 안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어.”'“근데 얼굴도 까먹어?”'“안 까먹었는데.”'“근데 왜 숨었어?”'대답도 못하고 커다란 눈동자만 굴리는 모습에 결국은 끌어안고 쪼옥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지오랑 인사 끝냈으면 얼른 밥해줘. 배고파.”'“밥도 안 먹었어?”'“먹었지.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어쩐지 아까부터 밥 얘기를 하더라니. 결국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주방에 들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앞날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시연 이모. 나 이거 볼래.”'“뭔데?”'간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내 캐리어 앞에 털썩 주저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지오가 보였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어린애가 뭘 알까 싶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신 난 듯이 꺄르르 웃으며 그 조그만 손으로 휴대폰 버튼을 꾸욱꾸욱 잘도 눌렀다.'“이모.”'“응. 이모 지금 밥 차려야 되니까 이따 놀아줄게.”'“이모!”'“엄마랑 놀고 있어. 금방 끝나.”'“엄마 자.”'팩,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드러누워 천하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신 언니가 보였다. 그 모습을 한심한 듯 보다가 방에서 담요를 들고 와 살짝 덮어주었다. 하지만 덮어주자마자 곧바로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야 말았다.'“인간, 참.”'“이모. 이건 뭐야? 어?”'아까부터 쫄랑쫄랑 따라다니던 지오의 앞에 앉아 작은 손으로 들이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코트에 흰색 목도리. 그리고 그 두 색과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하얀 얼굴. 까맣고 선해 보이는 눈동자는 비록 나에게로 향해져 있지 않지만 먼 곳을 응시하며 살짝 웃는 그 모습에 마음이 더 떨려왔다. 사진 속으로 보이는 희미하게 올라간 입 꼬리에 나마저도 수줍게 미소가 지어졌다.'“유현우.”'“응?”'유현우. 이름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의 주인공은 미술과 여자 후배들 사이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리던 최고의 인기 남이었다. 비록 선배는 이미 졸업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이에선 전설적인 미소년 왕자님으로 남아 있다. 군대를 제대한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머리칼도, 유난히 하얗던 피부도, 깔끔하고 단정했던 옷 스타일도, 말수가 적었던 것도, 그저 가끔씩 짓던 수줍은 미소도 모두 왕자님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충분했다. 안타깝게도 선배가 졸업한 후부터 연락이 끊겨버려 이젠 만날 방법이 없지만.'“응? 뭐야?”'나는 그제야 내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되뇌어 본 이름에 이미 정신이 저만치 나가 있던 것이다. 아직도 조그마한 손으로 나를 재촉하는 지오를 내려다보았다.'“지오야. 이럴 땐 뭐야, 가 아니라 누구야, 라고 묻는 거야.”'“누구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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