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들여다보는 노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그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할머니. 뭘 그렇게 보세요?”'“봐라.”'노인이 남자에게 사진을 건네고 안경을 벗었다. 오랫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눈이 침침하고 아파올 정도였다. 그녀의 머리칼은 백발에 가까웠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렸다. 눈빛은 빛을 잃은 듯 피곤해 보였다.'“어린애인데요?”'“지금은 24살쯤 되었겠지? 그대로 자랐으면 예쁘겠지? 엄마가 예뻤으니까 제 엄마 닮으면 예쁘게 자랐을 게다.”'노인은 마른 손으로 얼굴과 눈을 비비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얼굴에는 궁금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군데요?”'“누구? 내가 일전에 말했잖니. 네 정혼자라고.”'“할머니!”'그의 소리침에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여든 다섯으로 안 믿겨질 정도로 힘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옆에 놓여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난 네가 10살 때부터 정혼자가 있다고 말해왔었다. 그게 지금 몇 년인데 아직도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게냐?”'“전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저 결혼 안 합니다. 그 누구하고도 안 해요. 독신주의라고요!”'남자는 억울한 듯 뱉어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동안은 말씀도 안 하시더니 다시금 말씀을 꺼내시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어렸을 적에는 정혼자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남자는 정혼자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작정 반감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 줄도 모르는 외계인 같은 존재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그의 가슴에 반항심만 심어 주었다. 잊을만하면 말씀을 꺼내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렸다. 그리고 대학 시절 미팅을 나갔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할머니한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통화를 하는 남자의 휴대폰을 뺏은 할머니는 파트너에게 갖은 모욕을 주며 소리쳤다.''‘한 번만 더 현우 만나면 네 머리채를 다 뽑아 버릴 게다!’''울면서 전화를 끊은 여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 역시 상처를 받았다. 그때처럼 할머니가 무서웠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자신과 동생에게 소리를 친 적이 없는 할머니였기에 그 모습은 충격에 가까웠다. 평소 인자하고 온화한 눈빛의 할머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낯선 여인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날 이후 소문이 학교에 퍼지면서 남자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그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였다.''할머니의 한숨 소리에 남자가 회상에서 돌아왔다.'“내가 말했었지. 우린 너희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약속을 했다고. 그리고 이건 그 아이 할머니의 유언이기도 하다. 숨이 끊어지면서도 힘들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냐?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있니? 너희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내가 그 친구를 볼 수가 있다.”'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 노인의 팔을 붙잡으며 남자도 따라 일어섰다.'“어디 가시려고요?”'“앞장서라.”'“네?”'“이참에 서로 얼굴 익히자. 나도 커서는 그 애를 본 적이 없다. 너처럼 뭐가 그렇게 바쁜지 통 집에 안 붙어 있다는구나. 사진이라도 얻어오려고 했는데 사진 찍는 걸 워낙 싫어해서 없다는구나.”'그 순간 남자는 여자가 얼마나 외모에 자신이 없으면 사진이 없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도 변변한 사진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외모가 못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스크를 자랑스러워했다. 키 183cm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와 얼굴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성격 때문에도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주의자였다. 그렇다면 단순히 여자도 자신처럼 사진 찍는 걸 무척 싫어하는 타입일 수도 있었다.'“뭐해? 안 갈 거야?”'“꼭 오늘 지금 가셔야 합니까?”'“그래. 내 오늘 꼭 가야 한다.”'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할머니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비상사태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막상 정혼자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그 여자가 자신을 보고 죽자 살자 매달리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면 빼도 박도 못하게 상황은 점점 극에 치닫게 될 수도 있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순간을 모면해야만 했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르자 노인이 차를 멈추라고 했다. 그는 빠르게 차를 세우고 할머니가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집입니까?”'“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