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화가 났다. 그녀에게.'“스튜어트에게 어제 한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 내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해. 박 비서에게 내가 지시한 내용의 보고는 오후 한 시 이후로 듣겠다고 전하고.”'“예. 알겠습니다.”'귀영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 태환은 그대로 당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귀영도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이화에게 가까이 다가와 묻는다.'“뭐 잘못한 거 있어요?”'“…….”'이화가 대꾸하지 않자 귀영이 다시 물었다.'“계속 화가 나신 것 같아요. 홍 실장한테.”'제대로 봤다. 이화는 생긴 것과 달리 이럴 땐 재빠르게 눈치를 채는 귀영의 직감에 잠시 감탄했다.'“오늘 아침부터 계속 한마디도 안 하시잖아요. 홍 실장한테.”'이화를 흘깃 바라보던 귀영이 또 말한다.'“잘못한 거 있으면 빨리 사과하고 화 풀어드려요. 우리 의원님, 보기엔 부드럽고 인자해 보여도 화나면 무서워요. 아! 그러고 보니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이네요.”'그녀가 귀영을 바로 보자 그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다.'“서 의원님은 화나면 저러지 않거든요. 진짜 화가 나면 상대를 정면으로 공격하죠. 오늘 아침 홍 실장에게 하는 것처럼 일부러 말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그러진 않아요.”'그럼 뭘까? 화가 난 게 아니면 그의 행동들을 모두 뭐라고 해야 하지?'이화는 귀영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가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듯 속삭인다.'“우리 의원님은 지금…….”'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귀영은 주변을 잠시 살폈다. 복도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그가 그제야 말했다.'“삐치셨어요.”'이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서태환 의원이 어린아이처럼 삐쳤다고?'믿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귀영이 키득거렸다.'“진짜예요.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한데 서 의원님도 삐치긴 하시죠. 저도 딱 한 번 봤어요. 의원님 형인 서 선생님께 듣지 못했다면 저도 서 의원님이 삐치셨다는 걸 믿지 못했을 거예요. 서 선생님 말씀으로는 의원님이 한번 삐치면 무지 오래간대요. 정말 독하다 싶을 만큼이요. 사과를 받고 용서가 될 때까지는 말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답니다. 예전에 저한테도 그랬어요. 제가 정치에 성격도 안 맞는 것 같고 저한테는 비전도 없어 보인다고 의원님 따라다니는 거 그만두겠다고 한 적 있었거든요. 그땐 내가 의원님 옆에 있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은 자격지심을 가질 때였어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의원님이 저를 불러서는 아니라고 했는데도 제가 고집을 부렸죠. 그랬더니 가라고 하시더라고요.”'그때 일을 회상하듯 귀영이 잠시 바닥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도움 못돼서 떠난다는 놈은 노력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의 일에 의욕도 없는 놈 억지로 잡을 생각 없다면서요. 쿡쿡, 그날 이후로 절 소 닭 보듯 하시는 겁니다.”'이화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서태환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겪고 있지 않은가. 오늘 아침 집에서 만난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말도 걸지 않았다. 귀영의 말처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맹세하고 진짜 소용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노력해 보겠다고 하고 나서야 풀어지셨어요. 그리고는 절 끌고 가서 술을 잔뜩 먹이시더니 ‘너, 진짜 갔으면 정말 화내려고 그랬다.’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우리 의원님, 너무 귀엽지 않아요?”'이화는 당사무실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것만 약속하시면 의원님께…… 여자가 되겠습니다.’'‘내가 홍 실장한테 별로 믿음을 주지 못했군.’'‘……’'‘홍 실장이 그런 걱정을 할 만큼 내가 못 믿을 존재로 비쳤나? 홍 실장은 지금, 내가 여자가 필요해서, 단지 여자가 필요해서 홍 실장에게 손을 내민다고 생각하는군.’'‘그건…….’'‘홍 실장이 보기에 내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걸 망칠 사람으로 보이나?’'‘의원님…….’'‘그 정도로 내게 대단한 존재가 될 자신은 있고?’'‘전…….’'‘늦었군. 퇴근해.’'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난 남자를 풀어 줄 방법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화가 나게 했다는 걸 인정하지만 이화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서재를 나왔다. 날이 지나면 다시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그가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변명할 의향은 있고?'이화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날, 예비 캠프 사무실에서 그가 손 내밀지 않았다면 끝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어젯밤 그도 인정했듯 두 사람의 관계는 위험했다. 어쩌면 이대로 끝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의원님이 한번 삐치면 무지 오래간대요. 정말 독하다 싶을 만큼이요. 사과를 받고 용서가 될 때까지는 말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답니다.’'귀영의 말대로라면 그가 먼저 이렇게 위험한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안 가요?”'벌써 저만치 앞서 가는 귀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화는 몸을 돌려 귀영이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무거웠다.'도대체 이 마음을 어째야 할까? 이성보다 강한 힘으로 그를 잡으려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놓는다는 생각만 해도 이렇게 저리는 가슴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벌써 한 걸음 멀어진 그 남자를 어떻게 하면 놓을 수 있을까……?'그를 놓아야 한다는 머리와 그를 잡으려는 마음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화는 내내 굳은 얼굴로 눈짓 하나 보내지 않던 그를 떠올리며 가슴 한편 아릿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