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게 정리된 사무실의 분위기는 준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한 구석 먼지 한 톨 없었고,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류더미조차도 맞춤으로 올려놓은 듯 네 귀퉁이가 맞아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서류를 조심스럽게 다른 서류 위에 귀퉁이가 맞도록 올려놓은 준기는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180의 장신에 잘 맞춘 양복이 조금 마른 체형인 준기와 잘 어울렸다. 말랐다고는 하나 항상 운동으로 단련되어서 단단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구김 하나 없는 옷차림에 꼭 죄어진 보라색 넥타이가 날카로운 준기의 얼굴을 더욱 차가운 기색으로 만들고 있었다. 테 없는 안경 밑으로 영민하게 번뜩이는 눈가에 알 수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평상시 초조하거나 화가 나면 이를 악무는 버릇 때문에 얇은 입술이 더욱 가늘어져 일자를 그리고 있었지만, 정작 준기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한국에 있었다? 그런데 외국으로 간다고 한 이유는 뭐야? 너와 할아버지 두 사람 뭘 하고 있는 거냐?”'작고 낮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리며 준기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가 무참히 구겨졌다. 스스로를 진정시킨 준기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며 이젠 쓸모없어진 종잇조각을 휴지통에 버리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머니와 점심이 약속되어 있는 날이다. 지연과 함께.'-상무님, 최지연 씨 오셨습니다.-'책상에 올려진 기계만큼이나 사무적인 목소리에 준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곧 문이 열리고 창백한 지연이 들어오자 더욱 짜증이 일었다. '준기는 차가운 눈으로 책상너머의 지연을 힐끔 보면서도 정작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연은 익숙한 듯 말없이 준기 앞에 서서 멍한 눈으로 어깨 너머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그게 곧 약혼식을 올릴 여자의 모습인가?”'“나한테 무얼 바라는 건데요?”'고저도 없는 음성에 준기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여자치고 작은 키가 아니건만 가냘픈 인상의 지연은 외려 작아보였다. 긴 생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얼핏 이제 20대 초반으로 보이기도 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듯 커다란 눈동자가 겁먹은 사슴을 연상시키며 남자의 보호 본능을 일깨우지만, 준기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처음부터 지연은 그에게 진혁을 물 먹일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까지 생각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되지 않으며 절대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어머니를 존경하지만 그런 어머니 때문에 평생 기죽어 지내던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던 준기였다. 자신만큼은 절대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아 고개 숙이고 살고픈 마음이 없었다. '“나가지. 어머니가 기다리실 거야.”'“꼭 가야 하나요? 알아서 다 하면 되잖아요.”'지연의 말에 차갑게 굳은 준기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놀라 움찔하면서도 지연은 핸드백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그걸 말이라고 해? 어머님 약혼식도 아니고 우리 약혼식이야.”'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갑자기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지연은 속지 않았다. 그동안 준기를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의 음성이 부드러워지면 그것은 그만큼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 의견은 필요 없잖아요. 나와는 상관없이 진행될 일에 굳이 내가 따라다닐 필요는 없으니까.”'핸드백을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 하얀 손등 위로 파랗게 핏줄이 비쳐질 정도였지만 지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앞에 선 준기도 준기지만 준기의 어머니라는 사람은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죽고 싶은 지연에게 값어치 없는 물건을 대하듯 철저히 무시하는 그의 어머니는 더 할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어머니가 지연을 어찌 대하는지 곁에서 보면서도 준기는 단 한 번도 지연의 편을 들어주거나 보호해주려 하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들 사이에 앉아있는 생쥐가 된 기분을 다시 느끼느니 지연으로서는 차라리 준기의 분노를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래, 네 의견은 필요 없어. 하지만 따라는 다녀야지. 그게 네 일이니까. 그게 내가 원하는 거래조건이니까. 벌써 잊으셨나?”'작은 저항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인하는 순간 더 절망하게 된다. 이 남자와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하다니…….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미 하얗던 지연의 얼굴이 더는 어쩌지 못할 정도로 질려가고 있었지만 준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요, 거래였죠. 잠깐 미쳤었나 보네요. 제가 지금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명심하죠. 그럼 가요, 그 대단하신 여왕님이 계신 곳으로.”'숨어있는 자존심이 튀어 나왔음인지 지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순간, 준기가 돌아서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가는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지연의 얼굴에 얼핏 공포의 그림자가 어렸지만, 준기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녹아날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내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면 쓰나. 앞으로 시어머니 되실 분인데. 착한 며느리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말투와는 다르게 무섭게 번득이는 눈빛에 얼어버린 듯 지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팔을 푼 준기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정다운 연인이 되었지만, 준기의 품안에 있는 지연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