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열대어

시작은…….''투둑투둑 타닥타닥 투둑툭둑 타다다다다닥. '쓰고 지우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울리고 있다. 사람들이 다 잠든 시각 노란색 백열등만이 켜진 방 안에서 연진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보자, 얼마나 썼지?”'그녀는 마우스를 위로 올려보며 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꼬박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는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보니 다섯 장도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그녀가 오늘 안에 마무리해서 내일 아침 9시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는 30장 분량이었다. '‘미치겠군.’'욕이 절로 나오는 연진이었다. 그녀는 다시 글을 쓰던 페이지로 마우스를 내려 자판을 두드렸다. '위잉 위잉.'막 쓰려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라 자판을 치려는 순간 휴대폰이 떨리며 진동했다. 연진은 휴대폰을 들고 한쪽 방향으로 밀어 올렸다. 역시나 메시지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메시지가 아닌 원고 독촉.'‘허, 웃기고 있네, 원고 맡긴 지 얼마나 됐다고 독촉이야? 미리미리 펑크가 났으면 펑크 났다고 이야기를 해 주든가.’'그녀는 다시 절로 흘러나오는 욕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을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펑크가 날 것임을 알면 그게 펑크겠는가? 이왕 하기로 한 일 화내지 말자.’'연진은 끓어오르려는 화를 막아 보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한번 솟은 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급하게 부탁하던 일 흔쾌히 해준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독촉을 해오자 속에서 열이 났다. 연진은 자판을 두드리며 혼잣말을 했다.'“자료 수집해 놓은 거 있다고 내가 한다고 할 때는 안 내놓는다더니 어디다 독촉이냔 말이다. 하여튼 계획 없이 사는 사람들이야.”'휴대전화를 집어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잔뜩 한 그녀는 갑자기 두드리던 자판을 멈춘 후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를 삭일 뭔가가 필요했다.'“커피, 커피가 필요해.”'머릿속이 생각만큼 잘 안 돌아가거나 오타질을 해댈 만큼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커피를 찾는 연진이었다. 그녀는 쓰던 글을 저장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주변을 훑어보았다. 엉망이 되어 있는 그녀만의 공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부탁받은 원고 때문에 청소를 하지 못한 원룸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현관문에서부터 침대, 책상, 화장실, 그리고 부엌까지 한눈에 보이는 원룸 안 바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프린터 물, 군데군데 수집해 놓은 자료와 사진들 그리고 먹다 남은 과자봉지 저녁을 먹고 그대로 방치해 놓은 식탁으로 인해 가축우리보다 지저분해져 있었다. 청소는 마감이 끝난 후의 순서였지만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원고 때문에 순서가 밀려 버렸다. 연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을 모른 척하려고 슬쩍 눈을 감았다. 연속동작으로 머릿속으로 열심히 빗질도 해댔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고개를 흔들어대며 두 음절 이상의 비명을 내질러 버렸다. '“아악학.”'연진은 잊어야 할 상황이나 기억, 장면들이 떠오르거나 눈앞에 보이면 이렇게 지워 버리려 발악을 해댔다.'“안 되겠다. 우선순위를 정해야지.”'그녀는 다시 노트북이 놓인 작은 상 위로 다가가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물론 발밑을 내려다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작업이고 펑크고 상관없이 집부터 치우려 들 것이 뻔했다. 그런 충동을 막게 하기 위해선 일단 적어야 한다. 충동적인 것은 딱 질색이었다. 연진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어댄 후 다이어리에 일의 순서를 적기 시작했다. 차례대로 정리를 해야 보이는 것부터 해치우는 실수를 막게 될 것이다. 노란색 백열등 아래서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연진의 모습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보자, 일번은 일단 내일 아침까지 부탁받은 원고다.’'프리랜서의 생명은 마감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만큼 마감일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진이었다.'‘그래서 일번은 일단 마감이니까, 아니다 커피, 커피부터 타 와서 작업을 하는 거야. 발밑은 보지 마. 절대.’ '연진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이어리에 몇 가지 일을 순서대로 적은 후 조심스럽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뭐 몇 발자국 뗄 것도 없이 주방이었지만 자료를 잘못 밟기라도 해서 섞어 놓기라도 했다간 청소를 해치울 시간과는 더 멀어질 것이니 조심해야 했다.'오호호호호 오호호 아우 따라란따란.'조심스럽게 발꿈치를 들고 발걸음을 떼던 연진은 으스스한 벨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쿵. '휘리릭.'“어맛.”'그녀가 넘어지면서 생긴 바람으로 인해 바닥에 펼쳐져 있던 자료들이 펄럭거렸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울리는 전화기를 찾아 헤맸다. '‘분명 진동으로 해 놓은 것 같은데 벨소리를 누가 저렇게 해 놓은 거야?’'수신전화는 클래식 벨소리 그 외 휴대폰 소리는 다 진동으로 해 놓았었다. 그런데 저런 소리가 난다는 것은 누군가가 손을 댔다는 이야기였다. 누군지 범인 색출을 할 생각을 하니 밝아올 날이 정말 흥미진진했다.'‘일단 범인 차출은 나중에 하고, 누굴까?’'연진은 서류더미에 있던 휴대폰을 주워들었다.'“뭐야? 이 시간에 전화하는 인간은 예의도 모르는 거야? 여보세요?”'그리고 폴더를 열며 상대방에게 들으란 듯이 크게 말했다. 보나마나 메시지로 성이 안 찬 원고 독촉 전화일 것이다. 그러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뭣보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료를 보니 열이 나서 속에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우현준입니다.”'연진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 남자가 이 시간에 전화를? 내가 다른 사람 이름을 잘못 들었나? 아니 나한테 왜 전화를 한 거지?’'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정말 의외의 인물이라 연진은 너무 놀랐다. 그녀는 머릿속에 속속 들어차는 의문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내뱉었다.'“네, 서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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