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생활에 적응한 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번씩 낯선 환경에 멈칫할 때도 있지만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아니 솔직히 처음과 다르게 이곳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며 어떨 때는 편하기까지 했다.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는 많은 이들 덕에 지금의 나는 충분히 심리적,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상태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디 갈 건데요? 내가 같이 가줘요?”'내 주치의인 재하 선생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를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재하 선생님이라도 말이다.'“괜찮아요. 6시까지는 들어올게요.”'“은서 씨 꼭 나가야 돼요? 아니, 혼자 가야 돼요? 재윤이나 아님 세은 씨하고 같이 나가요.”'“다 바쁘신 분들인데 저 때문에 시간 낭비하면 안 되잖아요. 이건 변명이고 사실 혼자 나가고 싶어서 그래요.”'나는 슬쩍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디 아프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요. 그리고 사람들 많은 곳에는 되도록 가지 마요. 혹시나 다치면 큰일 나니까, 그리고 들어오기 전에 꼭 전화해요. 데리러 갈게요.”'“네, 저 어린애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알아요. 은서 씨가 너무 예뻐서 누가 잡아 갈까 불안해서 그래요.”'빈말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대꾸했다.'“선생님도 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다녀올게요.”'후다닥 밖으로 나온 나는 붉어진 뺨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휴,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네.”'나의 주치의인 그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진 이였다. 이제 막 서른으로 접어든 선생님은 아직 미혼이었으며, 아니 여자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수소문하여 알아낼 수 있었다. '“아, 택시!”'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나는 다가오는 택시를 서둘러 잡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왔다하더라도 사실 만날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낯선 타지에 머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거기다 항상 그곳에 있었기에 친구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오랜만에 맞는 자유라 친구가 없어도 좋았다. '“음, 선물이나 사드릴까?”'항상 나를 걱정하고 나를 챙겨 주시는 선생님을 위해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인데 벌써 택시는 시내로 들어섰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서 내려주세요.”'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린 나는 들뜬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다.'“사람들 많은 곳에는 가지 말라 했는데……. 선생님 선물만 사고 빨리 나와야겠다.”'선물을 받고서 기뻐할 선생님의 얼굴을 생각하니 괜히 설레기까지 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어떤 선물을 살지 고민에 빠진 나는 한 옷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보통 여대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예쁜 옷이 보이면 입어보고 싶었고, 사고도 싶었다. '“예쁘다.”'옷에 정신이 팔려 있던 순간 나는 이내 누군가와 부딪혀 바닥에 넘어졌다. 길 한가운데 서 있던 나도 잘못이 있었지만 앞을 보지도 않고 뛰어든 이도 잘못이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이봐, 괜찮아?”'나와 부딪힌 이는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남자였다. 나도 여자인지라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에게 넋이 나갔나 보다.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아, 괜찮아요.”'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친절히 내 옷까지 털어 주었다. 낯선 이의 행동에 거부감이 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꼼꼼히 털어 주는 그의 행동에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털게요.”'“아니, 그대로 있어.”'“네?”'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인가?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자연스럽게 행동해. 두리번거리지 말고 나만 봐.”'“네? 지금…….”'“우릴 주시하는 이가 아니, 널 주시하는 이가 꽤 많아. 넌 날 처음보자마자 나한테 호감이 생긴 거야. 물론 나도 너에게 호감이 생긴 거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우린 저쪽 카페에 들어가게 될 거야.”'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당황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표정과 달리 그의 표정은 자연스러웠다. 싱긋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웃어.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그건 나중에 묻고 지금은 웃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를 이상한 취급해서 소리 지르거나 도망가면 정말 일이 곤란해질 거야. 하은서.”'이 사람은 분명 나를 알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는데 그는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거지? 이 사람도 국정원 요원인가?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누구세요?”'“널 지키려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