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있으면서 잘도 원나잇을 즐겼다. 아니면 정말로 알바인가,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리고…….”'수인은 제 머릿속을 유영하는 그 다음 말은 입으로는 되새기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그대로를 버릇처럼 그려나가는 콘티 하나하나에, 따스한 햇살이 그곳을 비추기라도 했는지 너무도 따뜻함이 묻어났다.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순간 할머니 할아버지를 둘러싸며 재잘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음성들이 바로 옆에서 들렸고, 그 앵글 안에 잡힌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 뿌듯함을 서로에게 나눠줬다. 그런 모든 행복이 제 옆을 지켜준 당신이란 말에서 그는 더 이상 펜을 놀리지 못할 만큼 순간 숨이 막혀왔고 온 사지도 떨려왔다. 지금도 겹쳐진 팔등에 올려있는 그의 커다랗고 기다란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왜 답답한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들어오듯 죄어오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며 애꿎은 두툼한 입술만 질근거렸다.'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수인의 커다란 몸집이 그곳으로 향했다. 제 눈으로 점점 헤엄쳐 들어오는 연이수 그녀의 모습에서 수인은 생전처음으로 똑같은 경험을 두 번째로 하게 되었다. 심장이 잠시 아주 잠시 멎었다는 것을.'꿀꺽, 그의 목줄기를 타고 한 모금의 타액이 멎어 있던 심장 쪽으로 흘렀다. 그렇게라도 해서 얼른 그것을 동작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제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걸음부터 나타나 버렸다. 다가오는 그녀의 걸음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수인의 구둣발이 그러했다.''언제부턴가 아니 수영을 잃고 난 다음부턴가 이수는 제 고개가 점점 아래로 향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인 것 같은 죄책감이, 그곳에 그 시간에……. 죽지 않아도 될 그 사람 생각에 그가 있을 하늘을 올려다 볼 염치도 그와 거닐던 땅을 볼 엄두도, 항상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고개를 들라며 쳐든 시선엔 그가 있는 하늘도, 땅도 바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네 잘못이 아니니 고갤 숙일 필요 없다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것엔 이유도 상황도 있으니 변명도 말해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잊어야 한다 말하는 수영과의 일을 이 사람은 찬찬히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즐기라 말하는 것 같았다.'“무슨 일입니까? 연이수 씨!”'이수는 한참만에야 운을 떼는 장 부장의 목소리에 잠시 제 마음에 들어앉은 생각을 지워냈다.'“무슨 일이겠습니까! 어떤 말씀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나요. 좋다 나쁘다 기다 아니다 쓸모있다 쓸모없다 뭐든지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구요. 장 부장님!”'뒤로 한 발짝 물러섰던 수인의 발이 제 자릴 찾다 한 발짝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떫은 미소가 그의 입 언저리로 번져 들더니 가지런한 이도 드러냈다. 항시 미간이 좁아있던 눈매도 지금만큼은 쉬고 싶다 말하는지 널찍이 벌어졌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해버린 것이다. 덜컹덜컹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처럼 요란을 떨지만 그 방향도 세기도 반응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기에 가림막도 없는 그곳이니 얼른 집이라도 지어야 할 판이었다. '“아! 잊어버렸군. 연이수 씨는 항상 남의 생각이 중요하단걸 말입니다. 무슨 소리가 듣고 싶죠?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하는 칭찬입니까, 그게 뭡니까, 그것밖에 못 합니까, 하는 야단인 입니까, 뭐가 듣고 싶은지 말해보시죠.”'“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제 생각이 아니라 부장님 생각을 들으러 왔습니다. 저는.”'집을 지으랬더니 웬 생트집(?) 그것도 같은 집인 줄 알고 있는지, 수인의 딱딱한 구두소리가 이수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이수의 온몸에 돋아 있던 잔털들이 놀라 그녀를 잡아당겼다. 몸도 쭈뼛해지고 출렁 가슴도 놀라지만 그래도 고개는 내려지지 않았다. 시선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이 사람한테만큼은 절대 기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녀의 온몸을 지탱하고 있었다.'수인은 제 짙은 눈썹 아래, 그것만큼 검어 있는 두 눈동자로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 단 몇 초일뿐인 그 동작만으로 이번 역시 세 번째 심장이 또 제 구실을 잊어버렸다. 여태 느껴보지 못한 추태 아닌 추태에 수인은 어떻게든 떨쳐내야겠다며 또 다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어떤, 여자입니까?”'“무슨……어떤, 여자라뇨! 그 질문 상당히 이상합니다. 제 물음에나 대답해 주십시오. 장 부장님!”'“좋습니다. 내 물음 먼저 답을 하면 당신이 원하는 대답 해주죠. 어제 원나잇 입니까? 아니면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 항상 옆에 남자가 있어야 하는 겁니까?”'“무슨……잠깐, 오전에도 이상한 말씀을 하시던데, 남자라뇨! 무슨 남자를 말씀하십니까? 알아듣게 말을 해야 대답을 할 거 아닙니까?”'“어제 그 아파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나오던 길 아닙니까? 당신 뒤를 따라 나오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던데.”'이수의 곧아있던 자세가 휘청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던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말이었다. 자길……그런 쪽의 여자로 봤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말문도 막혀버렸다. 그러나 이내 그 기분도 잠시 잠깐, 그녀의 굳어있던 이목구비가 풀어지며 가장 먼저 입이 웃고 그 다음 눈이 웃어버렸다. '“하……하, 그거였습니까? 알아듣지 못하겠던 말이, 그런데 그게 부장님하고 무슨 상관이죠.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어떤 남잘 만나건 원나잇을 즐기건 설사……몸을 팔건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있습니다.”'차츰 독이 오르는 이수의 목소리가 그를 향해 찔러댔다. 어쩌면 상대에게서 흘러나온 말을 너무나도 많이 그 사람의 어머니께 들었던 터라 그런지 이젠 아니다 대꾸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기분은 달콤한 약과에 불구했다. 이윽고 그녀의 귀로 선명하게 들리는 수인의 또 다른 목소리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해저구만리 용왕님께 데려다 놓았다. 간을 구하겠다 꾀를 내어 토끼를 등에 업었던 자라처럼 그녀만 병든 용왕 앞에 남겨놓고는 쏜살같이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며 사라져 버렸다. '“그럼……나한테 팔죠! ……당신을.”'‘뭘……뭘, 팔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