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그녀는 잠복근무중 2권

늘 그랬듯이 경서가 손을 한 번 흔들더니 그녀가 사는 빌라 입구로 사라졌다. 규영은 한동안 경서가 사라진 빌라 입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사랑은 위태하고 불안했다. '그에게 사랑은 마음의 안정이나 안위는 없었다.'규희의 또 다른 인격은 규영에게 무서운 독점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규희의 또 다른 인격은 규영을 자신의 노예로 단정 지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노예가 품은 사랑은 용납 할 수 없는 월권이었다. 아니 애초에 노예에게 권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도 했다.'규영이 자신의 노예라고 단정한 규희의 또 다른 인격이 경서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경서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규희의 또 다른 인격 J는 거의 광포한 수준으로 규영을 폭행했다. 그는 무기력하게 감내했다. J는 또 다른 인격이자, 동생이었으니.'규희에게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새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규희는 몇 가지 절차 끝에 살인죄로 처벌 받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사방이 흰 병동에 감금되는 것으로 판결을 받았다.'규영은 그녀를 면회 간 그곳에서 아주 편안해 보이는 규희의 또 다른 인격과 그곳에서 공포를 느끼던 본 인격인 동생을 번갈아 가며 접했다. 규희는 자신의 본 인격이 돌아온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방이 하얀 벽에서 깨어날 때마나 공포에 질려 경악 하곤 했다. 어쩌면 그곳에서는 규희가 자신의 본 인격이 아니라 또 다른 인격인 J로만 사는 것이 더 견디기에는 편할 것이라 규영은 생각하기도 했다.'J는 아주 사악하고 음흉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규영과 규희를 손에 쥐고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했다. 동생은 자기가 원하는 순간에 자아를 가질 수 없었다. 반면 J는 시시때때로 본 인격을 접어 버리고 자아를 펼쳤다.'사실 어느 것이 그녀의 본 인격인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고, 실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감금하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그네들은 규희에게 모든 조처를 다 취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규영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파.”'규영의 마음속에 있는 그녀를 열어보이던 그날, 규희는 직면한 공포에 혼자 떨고 있었다. 희번덕 눈을 뜨며 주위를 경계하면서 손끝을 덜덜 떨었다. 그것만이 규희가 소극적이나마 자신을 지키는 방도였다.'물론, J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그 방어막을 뚫고 나올 테지만, 어쨌든 당시는 동생이 확실했다. 불안하게 주위를 경계하는 규희를 보며 규영은 그녀가 자신의 동생이 아닌 J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하루는 더러워진 내가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져.”'“누가 날 따라와.”'규희가 파르르 떨며 대꾸했다. 언제나 그냥 하는 말이었다.'“그래서 죽고 싶지.”'규희의 말을 예스럽게 넘기며 규영은 중얼거렸다. 규희가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누가 날 자꾸 따라와.”'그리고는 늘 그렇듯 길 잃은 새처럼 공포에 떨었다.'“죽으려고 했어.”'“저리 떨어져.”'규영은 가만히 그 등을 쓸어주었다.'“그런데 죽으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규희에게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디엔가 터트리지 않는다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하고 외치는 격이었지만, 터놓고 나면 답답한 가슴이 풀릴 것 같았다.'“그냥 날 내버려 둬.”'“그래서 내일 한번만 더 보고 죽자고 결심하곤 해.”'“그냥 내버려두면 좋겠어.”'“내 더러운 몸이 그녀를 사랑할 수 없어 가슴 한쪽이 아파. 죽을 만큼.”'“죽어.”'“…….”'“죽어.”'규희의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아니, J다. 믿기지 않아 규영은 동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러운 몸으로 그녀를 사랑 할 수 없다?”'걸걸한 규희의 목소리에 놀라 안고 있던 그녀를 확 밀어내고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언제부터 자신이 안고 있던 규희가 동생이 아닌 동생의 또 다른 인격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 죽고 싶다?”'J가 키득거렸다. 그랬다. 처음부터 자신이 안고 있었던 것은 규희가 아니었던 것이다.'“죽으라고 이 새끼야!”'광포해진 J는 그 힘이 성인 남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네 살이나 더 많은, 더군다나 남자인 규영이 이겨낼 수 없을 만큼 강했던 것이다.'그녀의 강한 난타에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그대로 맞고 있던 규영의 마음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한 길은 이런 여린 동생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으로 오는 자괴감과 아픈 동생에게 사죄하는 마음, 또 다른 길은 새아버지의 목숨을 단 한순간에 요절을 낼 수 있는 광포한 자신의 동생이 가진 또 다른 인격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였다.'“누가 네 주인인가 잘 생각해.”'한참동안 규영을 북을 치듯 난타하다가, 도저히 초등학생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갈라지고 날선 목소리로 내뱉었다.'“한 번 더 다른 곳을 보면 죽여 버리겠어.”'그렇게 말하며 부르르 떨다가 기절하듯 잠에 빠져 들었었다.'아주 순한 얼굴로.' '언제나 접하지만 늘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천진한, 그 순한 얼굴이 한순간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싶으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버리는지 규영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자극에 둔감해진 규영이 한동안 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던 대가로 규영은 죽음 끝에 서면 늘 떠올리던 경서를 잃을 뻔했었다. 그녀를 숨어서 기억하는 일조차 불가능하게 될 뻔했던 것이다.'불과 일 년 전에.'규영은 경서가 들어간 빌라 입구를 노려보다 자신의 차에서 내렸다. 규희의 다른 인격이 한다고 하면 기필코 해 내고야 만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경서와 기영사이에 존재하는 기류로 보아, 규희의 다른 인격이 경서의 심장에 날카로운 화살을 다시 겨눌 것이 섬뜩하게 예감되었다. 경서가 사랑에 빠져있었다.'그것도 J의 남자에게.'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차에서 내린 규영의 발밑으로 한줄기 바람이 스산하게 지나갔다. 규영은 자신의 바지자락을 스치는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전단지였다. 여전히 경서가 들어간 입구에 시선을 둔 채 몸을 굽혀 그 전단지를 주워들었다. 전단지 속에서 자동차 세일즈맨인 한 남자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뭐든지 해결해 준다고 말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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