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입장이라는 게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란은 준수의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누르고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집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의 우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의 손이 탄 준수의 집에 질투도 하고 자신과 준수만의 공간이 아닌 것이 아쉽기도 했었다. 크기도 적당하고 눈에 익은 준수의 아파트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은 떨어진 공간에 버려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화려한 거실에 어울리는 화려한 차림의 란은 꼭 이곳에 스며들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가득 배어있었다. 우정은 아직도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고 가방도 아직 어깨에 메고 있는 채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현관에 발만 들이고 있는 모양새는 처량하기까지 하다. 우정이 한심한 태도를 더 이상 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리석의 차가운 느낌이 발바닥에 그대로 전해지자 무언가를 실수했다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입구 한편에 거실화가 나란히 있다. 바보 같다. 군데군데 벗겨진 매니큐어가 한심스러운 발이 거실화를 신었다. 거실화 덕분인지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은 이제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바닥을 끌리는 듯한 조용한 마찰음만 들릴 뿐이었다. 우정이 꼭 갤러리처럼 꾸며놓은 긴 복도를 지나자 가장 눈에 먼저 뜨인 것은 안쪽 깊숙이 주방의 바깥쪽에 아치형으로 쌓아진 가벽이었다. 아치형의 화려한 대리석 기둥이 주방과 거실의 명확한 경계를 지고 있었다. 감탄사가 연신 나올 정도로 크고 넓은 거실에는 3인용 크기일 듯한 소파들이 TV에서 본 것처럼 네모난 모양새로 놓여 있었다. 우정은 소파 옆 바닥에 들고 있던 쇼핑백과 가방을 내려놓았다. 되도록 긴장하지 않고 당당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것에 위축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란이 우정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 부재중인 이곳의 집주인과의 친밀감일까? 역시나 처음 보았을 때부터 불쾌하게 자존심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란이 스쳐 지날 때마다 저번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독한 향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저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향수냄새를 참아내는 게 힘들었었다. 토하고 싶다. 오늘 먹은 거라고는 휴게소에서 사먹은 600원짜리 천하장사 소시지가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뱃속이 요동치는 듯 지독한 토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주방을 서성이던 란이 냉장고의 홈 바를 열어보더니 우정을 쳐다보며 묻는다.'“주스 마실래?”'도리질 치듯 고개를 젓자 란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서슴없이 내뱉는 반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반말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녀의 말투를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대우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 아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지 않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지금 도리질치는 고갯짓만으로도 충분히 어린 아이 같았고, 그래서 충분히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란이 주스를 따른 크리스털 컵을 손에 들고 우정의 곁을 지나 준수의 아파트 거실의 넓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는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주스를 홀짝이는 모습은 꼭 TV 속 연예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봐.”'란의 혼잣말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자신에게 묻는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자 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성질대로 다 발산하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되는지 대답이 더딘 우정을 뚫어지게 본다. 대답하지 말고 무시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이내 포기하고 대답한다.'“기우정요.”'“김우정?”'“아뇨. 기. 기우정이에요.”'“기우정? 특이하네? 재밌는 이름이야.”'“뭐…… 별로.”'란의 말에 심드렁한 대답이 나와 버렸다.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이름가지고 가타부타의 말을 붙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우정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름가지고 이야기를 듣는 게 드물었는데 란에게서 이름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을 듣는 건 좋지 않았다. 준수는 왜 저런 여자를 곁에 두고 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 집 비밀번호까지 알고 들락거릴 정도면…… 생각이 거듭거듭 반복되자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준수가 들어와 란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스러웠다. 연애를 하면서 애인의 여자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이렇게 앉아있는 상황은 처음 겪는 것이다. 사실 연애 자체가 처음이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각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란이 자신을 관찰하는 듯 쳐다보는 것도 귀찮고 싫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우정은 그녀를 무시해버리고 몸을 뉘였다. 엎드려 란의 기색을 살피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될 대로 되라. 더 이상 지독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프기도 울렁거리는 속을 참기도 귀찮았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수록 잠이 많아진다더니. 요새 우정이 딱 그 상태인 듯 했다. 엎드려있던 몸을 옆으로 뉘여 소파 등받이에 팔다리를 붙인 채 눈을 감았다. 피곤으로 뻑뻑해진 눈이 이제야 편해졌다. 자고 일어나면 란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는 보지 않는다면 더욱 기쁠 텐데……. 란이 주스 컵을 주방 싱크대에 나두고 소파에 맘 편하게 누워있는 우정을 가만히 보았다. 란이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맘 편하게 잠들어 있는 우정에게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중 타이밍 좋게 준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들어오는 입구와 등진 소파여서 준수는 란 이외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화가 난 표정으로 란만을 볼 뿐이었다. 란이 선수 치며 준수에게 빠르게 다가가 말한다.'“나보고 바로 오라고 해놓고…… 어디 갔다 온 거야?”'“너야?”'“다짜고짜 뭐가?”'“뭔지 몰라서 묻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말해.”'준수의 버릇이다. 말을 느릿하나 똑똑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화를 눌러 참으며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화를 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무섭기는 해도 기가 죽거나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에 서초동에서의 도형을 떠올렸다. 언제나 점잖은 신사인줄 알았던 도형은 란에게만은 언제나 비웃는 듯 깔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 란에게 회장님의 유언장이야기를 하면서 란은 유언장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말을 했다. 언급되더라도 자신이 과감히 잘라 버릴 거라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도형에게 웃어주었지만 비참함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성도회 회장님의 여자.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은 허울에 불과했다.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을지 몰라도 한순간에 모든 걸 다 빼앗아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해 안전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일 아닐까 싶었다. 도진이 성도회를 맡고 회장님이 돌아가신다면 그것은 란에게는 최악의 상황일 수 있었다. 란에게 끈은 준수여야 했다. 그 끈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그저 약간 일을 벌였을 뿐이었다. 이곳에 있어야 잔잔한 물결을 일렁이게 할 수 있을 터였다. 납득할만한 이유? 미래가 아무 걱정 없는 너는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꾹 눌러 참으며 말을 꺼냈다.'“네가 그곳에서 편하게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또.”'“회장님이 네가 성도회를 맡아 주셨으면 해서.”'“그리고?”'“나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이어서.”'“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