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일상이 한 달 가까이 계속 되는 중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세수는 과감히 생략한 채 늘어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우정은 뜨거운 태양빛에 짜증을 내면서 동사무소 앞으로 걸어갔다. 동사무소 앞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배부되는 구인광고가 실린 생활정보지가 종류별로 늘어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생활정보지를 종류별로 하나씩 빼내어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는 왔던 길을 돌아 집으로 걸었다. 우정이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온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다지 나쁜 머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름 공부도 한다고 했는데 간신히 국립지방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5학기, 2년 6개월을 다녔지만 과의 선택이 잘못됐었던 것인지 적응도 잘 안 되었고, 중요한 학업 자체에 취미가 붙질 않았다. 학교를 그만 두기 전 마지막 학기에 모든 과목을 F로 장식한 후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처구니없는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며 혼을 내던 부모님에게 우정은 너무도 당당하고 태연하게 돈을 벌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태연하게 말대꾸를 하면서도 마음이 좋질 않았다. 그나마 국립대였고, 학기 내내 단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생활비를 벌며 학교를 다녀서 부모님께 뻔뻔스럽게 말대꾸를 했다지만 죄송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제일 중요한 학업에 취미가 붙지 않는데 학교를 더 이상 다니는 것은 시간 낭비고, 돈 낭비였다. 휴학계를 내고 집에 온 첫날부터 부모님께는 금방이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고, 우정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정처럼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에게는 현실은 가혹한 것이었다. 특별히 큰 도시도 아니고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속초에서 우정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했다. 자격증이 있지도 않았고 작은 사무실에서 선호하는 상고출신도 아니었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은근 22살의 나이도 일자리를 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어야 할 텐데.”'우정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건물 쪽으로 바짝 붙으며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간절히 바랐다.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수나 하고 다니라는 순자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무시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옆구리에 끼고 온 생활정보지를 침대 위에 펼쳐놓고 구인광고란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경력자 우대, 상고 졸업자 우대, 왜 이리 우대하는 건 많은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그 흔하디흔한 학습지 교사는 대학 중퇴자가 아닌 대학 졸업자를 구학 있었다. 우정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다음 생활정보지의 구인광고란을 살폈다. 이것도 저것도 도통 우정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할 무렵쯤 눈에 띄는 구인광고가 있었다. 그 구인광고는 아무 내용도 없이 그저 여직원 구함이라는 다섯 자뿐이었다. 이거다 싶은 마음에 박수를 치고 얼른 휴대전화를 들었다. 속전속결이다. 저번 주에도 보지 못한 광고이니 이번에 처음 낸 광고가 분명했다. 무엇을 우대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먼저 연락하는 사람에게 승산이 있을 수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내내 조금이라도 예쁘고 상냥하며 신용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대신건설입니다.'적응되지 않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해버린 우정은 소리가 들어가지 못하게 휴대전화를 손으로 막고는 흠흠하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안녕하세요. 생활정보지 구인광고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여직원 구한다고 하신 거 맞으시죠.”'-나이가 어떻게 됩니까?'“……22살인데요.”'나이라는 이야기에 금방 말이 나오질 않아 잠시 뜸을 들인 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으나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느껴졌다.'-조양동에 있는 축협건물 2층이니까 이력서 가지고 와요.'“네? 지금 가도 될까요?”'-빠르면 우리도 좋죠.'“네. 감사합니다. 1시간 안에 가서 뵙겠습니다.”'우정은 전화기에 대고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인사했다. 나이만을 물어보고 방문하라는 것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으나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사무실의 위치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도보나 자전거가 가능한 곳이라 우정은 쾌재를 부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장을 열어 옷을 골랐다. 짙은 색의 청바지와 하얀색 멀티를 입은 우정은 면접용이라고 우기며 며칠 전에 엄마를 졸라 구입한 네이비 색 린넨 재킷을 걸쳤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모습은 과하게 꾸민 기색 없이 편안하면서도 아주 단정해 보여서 맘에 들었다.'“어딜 또 나가!”'“면접 보러 갈 거야.”'거실 벽에 걸려있는 전신거울에 모습을 비추고 있자 마당에서 들어온 순자가 새되게 소리치자 우정이 억울함을 담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면접이라는 말에 순자의 치켜 올라간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우정이 입고 있는 네이비 색 재킷의 등 뒤를 툭툭 털어준다. 오해한 게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갔다 올게요.”'“잘하고 와.”'적응 안 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괜히 고개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5학기 내내 엉망인 성적은 둘째치더라도 마음대로 학교까지 휴학한 딸이 얼마나 미울까. 우정은 자꾸 엇나가며 말마다 대꾸질을 하긴 했지만 순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취직만 되면 돈 벌어 엄마 다 준다.’ 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