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질 동 말 동, 해가 울긋불긋해진 산 위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저녁. 어디선가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옷 속 깊숙이 스며들 정도로 진하게 풍겨 왔다.'별장에서 초등학교까지 걸어오는 동안 이한의 몸과 마음은 가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른 계절과는 달리 가을의 바람은 오래도록 묻어 두었던 추억을 하나둘 꺼내어 그에게 펼쳐 보여 주었다. 처절하리만치 고독한 그의 삶을 도닥거려 주고 싶은 양, 바람은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한의 곁에 살랑이고 있었다.'‘동천 초등학교라…….’'그가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의 교정을 바라보며 이한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하얀색의 아담한 교사(校舍), 회양목으로 꾸며진 화단, 그리고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놀이터를 보는 순간, 이한의 기억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노름판에서 잔뜩 돈을 잃고 온 큰아버지가 애먼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맨 정신에도 발길질은 예사인 큰아버지가 술까지 취했으니, 아버지를 인간 취급할 리 만무했다. 재수 없는 병신이 집구석에 붙어 있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큰아버지는 급기야 마당 한쪽에 세워진 지게작대기를 들고 와 사정없이 아버지를 두들겨 팼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웅크려 맞고만 있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간 어머니는, 쏟아지는 매로부터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행여 아버지가 뿌리칠까, 몸의 무게를 실어 아예 아버지를 덮어 버리는 그녀였다. 먼발치서 관망하던 큰어머니는 남편이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자, 송장이라도 치를까 싶어 그제야 뜯어 말리는 시늉을 했다. '『내일 저개 꼴을 보문 동네사람들이 뭬라 하겠소? 우리가 멕여 살코 주는 줄도 모르고 뒷구녕으로 음청들 씹어 댈 텡게, 그만 하우. 엄한 지게작대기 뿌때지겠네.』'큰아버지는 슬슬 팔이 아파오던 차에 못 이기는 척 작대기를 마당에 휙 던지고는 욕지거리를 몇 마디 더 뱉은 후에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른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둘러업으려다 다시 휘청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댓돌 옆에 숨어 있던 이한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가 쓰러진 어머니를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훨씬 왜소한 열 살짜리 소년에게 어머니를 업을 만한 힘은 아직 없었다. 결국 이한의 부모는 서로를 의지한 채, 비틀거리며 외양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집 안으로 겨우 몸을 옮겼다. '부부는 그 흔한 빨간약 하나 없어, 터진 살 사이로 스며 나오는 피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는 게 전부였다. 점점 시커메지는 부모의 살 여기저기를 바라보던 이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딘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진 지 오래라 깜깜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 숨도 쉬지 않고 뛰었다. 예의고 나발이고, 이한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저대로 두면 두 분 다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학교 뒤편에 있는 작은 관사에는 다행히도 불이 켜져 있었다. 이한은 다급한 손놀림으로 미닫이로 된 관사의 출입문을 있는 힘껏 두드렸다. 윗부분에 붙어 있는 유리창이 흔들리면서 꽤 요란한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잠시 후, 편안한 차림의 윤 선생이 소란의 주범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냐? 늦은 시간에.』 '『선상님요! 지 약 좀 주오. 지발 약 좀 주오!』'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열 살짜리 소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이한아, 진정하고. 누가 어떻게 쓸 약인지 말해 봐. 그래야 선생님이 가져다줄 거 아니니?』'이한의 들썩이는 어깨를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윤 선생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바닥만 한 동네라 이한의 가족사를 빤히 알고 있는 그였지만, 혹시나 하며 확인차 한 질문이었다.'『아부이, 어머이가…… 마이 아파서…… 피도 나구…….』'원래 말이 없던 아이라 자분자분 대답하진 못했지만, 대충 흘러나오는 단어만 조합해 보더라도 윤 선생이 짐작했던 일이 맞는 것 같았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기다려. 금방 가서 약 가져올 테니.』'들어오라는 말은 듣지도 못한 듯, 이한은 부동자세로 선생님이 사라진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젖어 있는 이한의 눈에, 반짝이는 또 다른 눈이 들어왔다. 가끔씩 아버지를 따라 교실을 따라오곤 하던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였다. 선생님이 제인이라 부르던 인형처럼 예쁜 아이. '이한과 눈이 마주치자, 숨어서 보고 있던 제인이 갑자기 총총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그의 앞에 불쑥 하고 내밀었다.'『오빠, 울지 마!』'꼬깃꼬깃한 꽃무늬 손수건을 얼떨떨해하는 이한의 손에 쥐어 주며 제인이 말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이한의 모습이 몹시 안쓰럽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손에 쥔 손수건을 돌려줘야 할 것 같아 이한이 주춤거리고 있을 때, 윤 선생이 이것저것 챙겨 넣은 약들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한은 당황하여 얼른 바지주머니 안에 손수건을 집어넣었다.'『잘 듣고 그대로 해야 한다. 우선 이 알약은 두 분께 두 알씩 드시게 하고, 빨간약은 피가 난 상처 부위에 발라 드려라. 그리고 이건 멍든 부분에 손으로 잘 펴서 발라 드리고, 이건 허리나 어깨 부위가 불편하시다고 하면 붙여 드려. 이한이는 똑똑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윤 선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한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쓰다듬어 주었다.'『혹시나, 그런 일은 다신 없어야겠지만……. 여분의 약을 많이 넣었으니, 두었다가…….』'윤 선생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이한을 품에서 놓아 주었다. '『고맙습니데이. 증말 고맙습니데이.』'이한은 여러 차례 인사를 하고는 왔던 길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산골길을 서둘러 달려가던 이한은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서 뜨끈한 물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을 부모를 생각하면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