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야!”'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 우 선배다. 캠퍼스 언덕길을 내달려오는 훤칠한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헤벌쭉 벌어지는 입가를 추스르기 힘들다. 보기 드문 갈색 눈동자에 빛나는 머릿결, 샤프한 이목구비를 한 큐에 부드럽게 만드는 귀여운 보조개. 저 남자가 내 남자라니…… 하루에 골백번도 말해보지만 만난 지 100일이나 지났는데도 믿기 어려울 때가 많다. '“선배 뭐가 그렇게 급해요? 헤헤.”'“아프다며? 어디가 어떻게 아파?”'선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긴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짚어본다.'“아니, 좀 체한 것 같아요. 하필이면 오늘 과모임인데, 좀 아쉽네요.”'“아픈데 그게 중요하니……. 얼른 기숙사 가서 약 먹고 푹 쉬어. 내가 데려다 줄까?”'“됐어요, 바로 앞인데 뭐. 얼른 수업 들어가요.”'“그래 이따 전화할게. 몸조리 잘해.”'뒤돌아 가는 선배를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바늘로 쿡 찌르는 듯한 복통에 난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금요일 오후의 기숙사 안은 썰렁했다. 마시고 죽는 금요일 밤을 위해 죄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상비약으로 서랍에 넣어둔 활명수를 꺼내 마신 뒤 서늘한 침대에 누웠다. 아직 위장까지 못다 내려간 활명수 특유의 맛이 목구멍에서 올라왔다.'“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궁상맞게 내 배를 내가 문지르며 ‘엄마손 약손’을 부르고 있으려니 문득 서글퍼졌다. 스멀스멀 몰려오는 왠지 모를 우울한 기분에 얼른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창틀에 부딪히는 찬바람 소리가 적막감을 더했다.'“드르륵, 드르륵.”'얼마나 잤을까. 책상 위에 진동모드로 놓아둔 핸드폰이 미친 듯이 떨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몸을 가누어 핸드폰을 열었다.'“여보세요…….”'“야!”'“아우, 귀 따가워.”'“좀 괜찮니?”'내 룸메이트이자 단짝친구인 윤미소다. 애주가인 미소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로 고함치듯 주변사람들과 말하며 수화기 너머로 내 이름을 불러대는 중이었다.'“빨리 나와.”'“나 상태가 별로 안 좋다니까.”'“거기 귀신 나온다. 지금 그 층에 아무도 없을걸.”'“야 왜 겁주고 그래!”'“내가 장담하는데 넌 오 분 안에 나오게 돼있어. 끊는다.”'미소가 전화를 끊은 후, 아니나 다를까. 극도로 겁이 많은 난 코트만 얼른 걸쳐 입고는 기숙사를 달려 나왔다. 밤 열시. 짙은 어둠이 깔린 길을 달려 과방이 있는 건물로 도착했다. 미소가 놀릴까봐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과방으로 향했다. 술판이 한창일 곳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과방 문 밖으로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난 전화를 받으며 과방 문을 밀었다. 수화기 너머로 재촉하는 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야! 난데! 나왔어?”'과방 안으로 한걸음 내딛은 난, 순간 동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눈앞엔 믿기 힘든 광경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한 장면처럼 내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우 선배와 조교가 소파 위에 한데 엉킨 채 진한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연신 우 선배의 목덜미를 감아 당기는 조교의 파르르 떨리는 팔과 그의 거친 숨소리에 굳었던 내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야! 깜빡했는데 과방이 아니고 동아리방이다! 지금 파전에 막걸리에…….”'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에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순간 세 사람의 숨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