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꽁꽁 얼어붙었던 길이 포근한 햇볕에 녹아내리고 어느새 더운 겨울코트 보다는 교복만으로도 충분함을 느낄 만큼 날씨가 포근했다. '서희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금세 친해진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집으로 향하고 있다. 교복이 아직 잘 어울리지 않을 만큼 조그만 체형인 꼬마 숙녀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길을 가다 말고 까르르 웃으며 신이 난다는 표정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그녀들은 방과 후에 다 함께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집 앞에 이르자 서희는 친구들에게 잠시 후 만날 것을 재차 약속하고 집 안에 들어갔다. '행여나 늦을까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야 사촌 오빠인 상혁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오빠는 대학생이다. '“엄마는?”'“이모? 몰라. 오늘 오빠 친구가 오랜만에 온다고 아까 장을 봐야겠다고 하시던데 시장 가신 거 아니야?”'“아, 동준이? 친구 덕에 오늘 포식을 하겠네. 그런데 너는 어디 가니?”'알록달록한 앙증맞은 니트와 편안한 바지 대신 청바지로 갈아입은 그녀를 보며 상혁이 물었다.'“응, 친구들하고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어.”'그녀는 얼른 오빠를 위해 밥과 국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앉아 이모가 맛있게 끓여놓은 된장국에 말아 놓은 밥을 서둘러 먹으며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는 사이 틈틈이 대답을 했다.'“그래? 돈은 있고?”'“응. 이모가 주신 용돈을 조금씩 모아 놓아서 쓸 만큼은 있어.”'식탁에서 그녀가 차려준 밥을 먹던 상혁은 금세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담고 있는 서희를 보더니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엊그제 오빠, 아르바이트 해서 월급 나왔잖아. 이거 가지고 가서 친구들 하고 맛있는 거 사먹어라.”'그가 건넨 것은 배춧잎, 그러니까 만 원짜리 한 장이다. 한 달 용돈 삼 만원을 받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되게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그 돈을 받아들었다.'“오빠…….”'“이모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짐하자 서희는 감동받은 표정이 되어 갑자기 오빠를 와락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오빠가 역시 최고야.”'서희의 애교에 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음, 그 말, 잊으면 안 된다. 나중에라도 오빠보다 애인이 더 좋다고 하면 이 오빠 삐칠 거야.”'그녀 나이로서는 너무도 낯선 애인이라는 낱말에 서희는 얼굴을 붉히며 오빠를 툭 쳤다.'“오빤, 난 애인 같은 거 안 만들어. 징그럽게.”'“그거야 나중에 보면 아는 거지.”'그는 귀여운 듯 그녀의 약간 하늘을 향해 솟은 코를 잡고 흔들었다.'“늦겠다. 어서 가봐.”'“응, 갔다 올게.”'뜻하지 않게 생긴 용돈에 기분이 좋은 듯 서희는 큰 소리로 인사하며 집을 나섰다. 상혁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뛰어나가는 서희의 뒷모습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저 녀석. 어느새 저렇게 자랐군.’ '침울한 얼굴로 우리 집에 온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9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장사를 하던 서희의 부모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며칠 후 서희는 그녀의 이모, 그러니까 상혁의 어머니의 손에 끌려 그의 집에 들어왔다. 나이에 맞지 않게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어린 아이, 귀여운 서희가 동생이 된다는 말에 마냥 기뻤지만 어린 나이에 슬픔을 지니고 있던 그 조그만 얼굴을 보는 순간 마냥 좋아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가 그 아이의 좋은 오빠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 귀여웠던 어린 꼬마숙녀는 이제 벌써 중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상혁에게는 귀여운 꼬마로만 보일 뿐이다.'''몇 시간이나 놀이공원에서 놀던 서희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더 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그런지 날씨는 추웠지만 모자를 쓴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오늘은 친구들과 정말 재미있었다. 바이킹을 타면서 소리를 많이 질러서 목이 얼얼하긴 했지만 그녀와 두 친구는 정말 그동안 공부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신나게 놀았다.'“야, 그런데 거기서 국사랑 닮은 사람 못 봤냐?”'“어, 봤어, 봤어. 정말 똑같게 생겨서 깜짝 놀랐다. 엉덩이를 쑥 내밀고 가는 것까지 어쩜 그렇게 똑같니. 서희 넌 못 봤냐?”'“아니, 못 봤는데? 그렇게 똑같아?”'“어, 난 국사가 놀이기구를 타러 온 줄 알고 급하게 돌아서다가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니까.”'어린 숙녀들은 특유의 큰 소리로 웃고 수다를 떨며 걷다가 항상 지나치는 서희의 집 앞에 다다랐다.'“놀다가라고 하고 싶은데 오늘은 군대 간 오빠 친구가 온다고 해서 안 되겠다.”'“됐어, 엄마가 오늘 핫케이크 구워주신다고 했어. 집에 일찍 가야 돼. 월요일에 보자.”'“응.”'서희는 친구들이 가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가 구워주신 핫케이크라……. 어렸을 적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자신의 엄마도 그것을 많이 구워주셨을 것이다.'‘아니야. 뭐, 나한텐 엄마가 안 계셔도 이모하고 이모부, 오빠가 있잖아. 엄마 아빠보다 더 잘 해 주시는데, 뭐.’'부모가 있는 아이를 부러워하는 것조차도 마치 이모 내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 만큼 잘 해주시는 분들이었다. 그녀는 다시 밝은 얼굴로 대문을 향해 돌아섰다.'이 초인종을 누르면 오빠, 엄밀히 말하면 사촌 오빠인 상혁이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귀여워 해 주고 업어서 키우다시피 한 상혁은 이제 성숙할 만큼 성숙한 그녀를 등에 업지 못하자 가끔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이모 몰래 비교적 큰돈을 용돈으로 주는 식의 방법으로 자신의 동생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곤 했다. 덕분에 서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경험을 남다르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빠와 이모, 이모부에게 남들과 같이 애교가 많은 딸이 되었다.'오빠가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지만 충분히 문이 열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자 다시 한 번 재차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파란 대문이 전자음을 내며 열렸다. '그녀는 모자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네가 서희로구나. 많이 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