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마친 예린은 조금 전에 본 남자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어떻게 발견한 남자 주인공인데 하며 가방 속을 뒤졌다.''‘어떡해. 큰일이다.’''가방을 통째로 뒤집어 보아도 카메라는 들어 있지 않았다. 겨우 겨우 찾은 남자주인공의 모습은커녕 언젠가는 쓰임새가 있으리라 담아둔 하와이의 모습도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원피스를 끼어 입고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자신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둘러보는데 주먹만 한 돌이 있는 틈으로 메모지가 보였다.''[카메라를 찾고 싶으면 프런트로 가.]''[3205]''프런트에서 내어준 쪽지에는 달랑 4개의 숫자만이 적혀 있었다. 룸 넘버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니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32층에서 3205라는 룸 넘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나서 벨을 눌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쭈뼛거리고 서 있는 자신을 남자가 끌어당겼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잠깐 앉지 그래.”''하얀색 탱크 탑에 편안해 보이는 면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가 소파를 가리켰다.''“카메라 찾으러 왔어요.”''예린은 꼿꼿하게 선채로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알고 있으니까 일단 앉아.”''반말로 명령하듯 지껄이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외모와 싸가지는 반비례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생김새만큼이나 그는 로맨스 소설 속에 남자하고 하는 짓거리까지도 똑같았다. 대체로 소설 속에 남자는 거의 대부분이 저렇게 싸가지는 국 끓여먹고 시건방진 놈들이 판을 친다.''“한국나이로 서른둘이야. 나 보다 어린 거 맞잖아?”''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남자가 제 속을 꼭 집어내자 안 그래도 불편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예린은 남자가 앉은 소파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반대편 스툴에 조심스레 앉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카메라는 영영 내어 주지 않을 거 같아서였다.''“물기부터 닦아. 하와이라고 만만하게 보면 절대 안 돼. 여기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감기가 흔한 곳이지.”''그가 내민 타월로 머리를 닦았다.''“카메라는요?”''“할 말이 그것뿐이야? 그렇게 중요한 카메라였어? 그런데 칠칠치 못하게 흘리고 다니는군.”''자신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듯한 남자를 보니 목소리에 날이 섰다.''“댁한테 다른 할 말이 있을 리 없잖아요. 카메라나 돌려주세요.”''“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GIVE AND TAKE는 알고 있겠지?”''짧은 영어 문장 하나였지만 남자가 교포라는 사실을 특유의 버터 발음이 증명해 주었다.''“그런가요? 그럼 보상을 조금 해드리죠. 얼마면 되겠어요?”''“돈이 많은 모양이지? 그래, 얼마나 주려고? 내가 그렇게 빈티가 나는 줄은 몰랐어. 쿡쿡.”''쿡쿡거리며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그냥 돌려줄 마음이 없잖아요. 댁이 빈티가 나던 부티가 나던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돈은 필요 없어.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카메라는 돌려주지. 어때?”''“뭐에요? 그 요구조건 이란 게”''“글쎄……나랑 같이 낮잠을 한숨 자는 것도 괜찮고…… 서핑을 했더니 좀 피곤해서 말이야.”''그의 손끝이 화려한 시트가 덮여있는 침대를 가리켰다.''“뭐라고?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카메라 내놔, 당장 안 내놔?”''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봐주는데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화내니까 섹시한데.”''“보자 보자 하니 이자식이 정말.”''예린이 파르르 떨며 한손을 치켜들었다. 뺨이라도 한대 갈겨주지 않으면 제명에 죽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치켜들었던 손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남자의 손에 잡혔다.''“정말로 화가 났군. 그만 할게. 농담이었어.”''침대 맞은편의 서랍장에서 카메라를 꺼내든 남자가 다시 말했다.''“일단 카메라는 돌려주지. 내용은 안 봤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의 것을 함부로 열어 볼 만큼 매너 없는 놈은 아니거든.”''그를 향해 셔터를 눌렀던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나는 이정우. 스티브라고 불러도 좋아. 당신은 이름이 뭐야?”''“알 거 없어요.”''“그래? 그럼 좋을 대로 해. 내 요구 조건을 말하지. 6시까지 로비로 나와. 디너를 할 거니까 괜한 오버는 하지 말고. 당신 같은 애송이한테 치근댈 만큼 아쉽진 않으니까. 혼자 먹는 것 보단 나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 뿐이야.”''남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타입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슬며시 올려다 본 그의 눈가에 외로움이 사무쳐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보상 운운하는 당신이니 약속은 지킬 거라고 믿어. 나는 좀 쉬어야겠어. 당신도 가서 쉬어. 이따 6시에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