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연하와 초콜릿

“내, 내가 좀 급해서 그런데……. 휴, 휴지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에라, 모르겠다. 서연은 울상을 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휴지라니요?]'이 여자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규완은 이를 박박 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절정에 오른 듯 신음성을 내질렀던 서연이 갑자기 휴지를 찾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뒤처리를 휴지로? 규완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 변했다.'[휴지가 왜 필요한데요?]'규완의 음성은 심히 도전적이었으며 삐딱하기 짝이 없었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서연은 예상치 못한 규완의 태도에 당황하면서 울컥 열이 치솟았다. 얘는 갑자기 왜 또 정색하는 거야? 서연은 알고 있는 갖은 욕을 휴대폰에 대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아쉬운 처지였으므로 겨우 분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최대한 온화한 음성을 내기 위해 휴대폰에서 잠시 입을 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뒤처리를…… 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휴지 좀 가지고 와 줘. 부탁이야.”'뭐가 어쩌고 어째? 규완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거기가 어디인데요?]'“여기? 아, 여기가…….”'규완은 서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요 며칠 접한 서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방탕한 여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규완이 본 서연은 그랬다. 규완은 그가 그녀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서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봐야만 했다. 서연이 부디 혼자 있기를, 규완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여기가 어디냐면…….”'[꾸물대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봐요.]'“그러니까 여기가…… 사원 화장실이야.”'서연은 부끄럽기 그지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하며 속으로 쓴 눈물을 삼켰다. 비록 그녀가 규완을 한참 어린 후배로만 생각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조리실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휴지를 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화장실에서는 며칠만의 쾌변으로 인한 서연의 배설물 냄새가 가득했다. 그 냄새는 서연 자신이 맡아도 참기 힘든 것이었다.'[사원 화장실이요? 여자 화장실?]'“그럼 여자 화장실이지 남자 화장실이냐? 잔말 말고 얼른 휴지나 뜯어 와. 되도록 많이!”'[알았어요.]'서연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당차게 규완에게 대꾸하며 전화를 끊은 서연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래! 사람이면 다 똥도 쌀 수 있는 거지, 뭐. 자기는 똥 안 싸나?”'어차피 여섯 살이나 어린 규완한테 잘 보일 일도 없을 것이다. 냄새가 좀 지독하긴 하지만, 뭐 어떠랴. 설마 온 호텔에 떠들고 다니기야 하겠어? 일단 그녀는 재빨리 변기 물을 내리고 가만히 변기 커버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얼굴로 규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흘렀건만 웬일인지 규완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었다. 슬슬 기다리는 데에도 이골이 날 무렵, 드디어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 이게 무슨 똥내야?”'이런 눈치 없는 자식.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단 말이다! 서연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울상을 지었다.'“선배! 선배 어디 있어요?”'“여기!”'서연은 창피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답했다.'규완은 화장실 한쪽에서 들리는 서연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서연이 있는 듯 보이는 화장실 칸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규완은 코를 집게손으로 집어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 그럼 똥을 싸고 있었던 거야? 규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야, 뭐해! 휴지나 얼른 밑으로 밀어!”'“선배.”'“왜!”'“설마 똥 싸고 있었어요?”'순간 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여간 아픈 곳을 찌른다니까! 서연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했다. 큼큼 하며 헛기침을 한 서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그래!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창피해 죽겠으니까 얼른 휴지나 넘겨!”'여전히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채 규완은 머뭇머뭇 허리를 굽혀 문 밑으로 휴지를 밀었다. 서연은 허리를 굽혀 잽싸게 규완의 손에서 휴지를 낚아챘다. 서연에게 휴지를 건넨 규완은 이 황당한 상황에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헛웃음만 터뜨렸다. 규완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얼굴은 아리송하게 변해갔다. 그런데, 이렇게 흉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정도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규완이 건네준 휴지로 뒤처리를 끝낸 서연은 옷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는 끊임없이 속으로 웅얼거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제 뭐 먹었어요?”'“뭐, 뭐?”'“웬만한 거 먹고는 이런 냄새 나기 쉽지 않은데…….”'규완이 웃을락 말락 한 얼굴로 서연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서연은 무엇인가 말하려 입을 벌리다 곧 꾹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을 하던 규완의 비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서연은 분이 나는 듯 규완을 흘겨보았다.'“내가 남자로 안 보여요?”'규완이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고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물었다. 서연은 눈에서 힘을 빼고 무슨 소리냐는 듯 규완을 보았다. 규완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그는 화장실 벽에 기댔던 등을 떼고 서연의 앞에 섰다.'“무슨 소리야?”'서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달리, 서연은 규완이 무엇을 말하는 지 언뜻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냄새 나는 화장실에 불러내서 뒤처리할 휴지나 부탁할 만큼, 그런 흉한 모습 보일만큼 내가 아무렇지 않으냐고요.”'서연은 규완에게서 등을 돌려 세면대로 걸어갔다. 콸콸 흐르는 물에 손을 씻던 그녀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응.”'“뭐라고요?”'규완이 어이없다는 듯 콧바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서연은 씻은 손을 건조기에 말리며 규완을 슬쩍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었어. 너 사원 휴게실에 있었잖아. 이 화장실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네 말대로 이런 흉한 모습 보여도 괜찮을 사람도 너 하나더라. 아무튼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창피해 죽을 뻔했어.”'“나한테는 안 창피해요?”'“창피하긴 하지만 일하고 있는 사람들 불러낼 수는 없잖아.”'“그러니까 내가 남자로 안 보인다는 거네?”'규완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비좁고 조용한 화장실 안에서 규완의 목소리가 서연에게 들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너 말이 좀 짧다?”'손을 다 말린 서연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리며 규완을 바라보았다. 규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얼굴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약간의 심통 같은 것이 묻어나 있기도 했다.'“다 큰 남자한테 똥 싸고 휴지 달라는 여자가 말은 많네.”'“뭐, 뭐야?”'서연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규완은 서연을 힐끗 보더니, 뭐라 작게 중얼거리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화장실에서 나갔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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