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맹목

5월 5일. 어린이날, 날씨 맑음.'까지 써놓고 더 이상 써내려 갈 말이 없었다. 당연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우현은 제 손에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우현아, 진주 어머님께서 오셨단다.”'원장 선생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늘 ‘진주 어머님’이라고 말을 할 때엔 목소리도 상냥하고 얼굴도 웃는 상으로 변한다. 역겹게. 가증스러운 위선이라는 것쯤은 어린 우현도 알고 있다. 진주 어머님. 생략된 것을 다 나열해서 말하자면, 진주‘의’어머님. 계기가 무엇이었더라고 하더라? 계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여하튼 우연이었다. 우연으로 저를 이 고아원에서 만나 쭉 후원해 주었다. 덕분에 일기장도, 연필도,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가질 수 있었다. 신발을 신었다. 옆에는 원장 선생이 진즉에 꺼내 놓은 새 운동화가 있다. 아, 빼먹은 것이 있다. 일기장도, 연필도,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리고 이 새 운동화도. 일부러는 아니지만 그냥 새 운동화를 신지 않고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낡은 게 나았고 훨씬 편했다. 터덜터덜. 신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 날. 지난해처럼 장난감 선물을 줄까? 내 나이도 어느덧 열세 살이 되었는데 이젠 장난감이 반갑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설령 아무것도 선물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녀, 그러니까 진주 어머니를 만나는 날이면 그냥 그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외롭고, 외롭고 고독했던 시간 속에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위안이다.'“이야, 우현이 그새 키가 자랐구나?”'“안녕하셨어요.”'습관처럼 진주 어머니는 우현의 머리 위를 쓰다듬으며 키를 어림짐작해 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작년보다 2cm 정도 키가 더 자랐다. 기분 좋게 쓰다듬는 제 손길을 넘어 다른 손은 여자아이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굳이 제게 소개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주, 네가 진주구나. 윤이 나는 원피스 차림에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양 갈래로 묶고 아이가 신은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 옷은 깨끗했다. 향긋한 섬유 냄새도 났다. 그런데 진주가 입은 옷은 그러니까 여자아이의 옷이라는 거 말고 다른 의미로 저와 차이가 났다. 어렵사리, 가끔 좋은 선물을 받아 깨끗하게 차려입은 저와는 다르다. 늘, 항상 곁에서 꾸며 주는 손길이 있으며, 잊지 않고 세탁이 된 옷을 입겠지. 반찬이 옷에 잘못 튀겨도 그것을 벗어 놓으면 당장 갈아입을 옷‘들’이 있는 옷장이 있겠고 윤이 나는 구두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을 때면 다른 구두를 갈아 신으면 될 테지. 우현은 제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진주를 뚫어져라 쳐다 보다가 이만 시선을 거뒀다.'“자, 인사해. 여기는 내 딸 진주. 여긴 엄마가 얘기 많이 해 줬지? 우현이, 박우현.”'진주는 활짝 웃으며 엄마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우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안녕, 우현아? 난 진주라고 해. 서진주.”'“서진주…….”'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우현은 진주의 이름 세 글자를 소리 내어 불렀다. 알아, 서진주. 네 이름이 서진주라는 것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알 수 있어. 습관, 사람은 습관에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의도하지 않아도 네 이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어. 서진주. 웃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웃음인지 처음 보는 우현에게 진주는 맑게도 웃고 있었다.'“어, 그래 안녕.”'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진주가 들리게끔 목소리를 내었다. 겨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그래, 진주가 어색했다. 그렇게 익숙한 이름인데도 제 앞에 서 있는 진주는 어색했다. 진주는 진주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엄마를 똑같이 닮아 있었다. 한쪽만 들어가는 보조개, 웃을 때 휘어지는 눈. 어쩌면 같은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항상 저를 쓰다듬어 주는 진주 어머니와 같은 손길에서 나는 향기가.'“둘이 잠시만 여기 있을래? 원장님과 얘기할 게 있어서.”'“네.”'“응!”'멀리에서는 정말 원장 선생이 진주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은 진주를 등진 채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데 인사로는 부족한 모양인지 진주가 말을 걸어온다.'“정말 반가워. 얼마나 널 궁금해 했는지 몰라.”'“내가…… 궁금했다고?”'내가 널 궁금해 했듯이 너도 날 궁금해 했을까? 글쎄, 좀 다를 것 같은데.'“응, 무지무지 궁금했어.”'“왜?”'“응?”'“왜 내가 궁금했는데?”'무례하다고 여길 만큼 말투는 상냥하지 않았다. 잔뜩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진주에게로 향하는 우현의 말은 비꼼이 섞여 있다. 반갑다며 웃고 있던 진주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힌다. '“늘 엄마에게 말로만 듣다 보니까…… 넌 내가 반갑지 않아?”'“어, 나는 네가 하나도 반갑지 않아.”'이상했다. 이상하고 간지러운 마음이 진주를 괴롭히라고 자신을 부추기는 것 같다. 왜? 이건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까. '“처음이라 그런가 봐. 앞으로 괜찮아질 거야.”'“앞으로?”'“응, 우리 이제 같이 지내. 어때? 신나지?”'진주의 말을 끝으로 우현의 시선은 원장과 진주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닿았다. 무어라 심각하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가 원장은 특유의 가식 섞인 미소를 띠우며 악수를 청하고 있다. 다시 우현의 시선은 제 앞의 진주에게 향했다. 너랑 내가 앞으로 같이 지내?'“신발, 왜 이거 신고 있어?”'친히 우현의 낡은 운동화를 손으로 가리켰다. 공격적인 말투를 하는 우현 덕에 진주는 당황했지만 그것 때문에 굳이 거리를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아원에서 자라면 그럴 수 있다고 엄마가 미리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경계. 나를 경계하는 걸까? 그리고 운동화. 잘 다려진 깨끗한 남방과 깨끗한 청바지와는 대조되게 낡은 운동화였다. 분명 새 운동화를 사서 보낸 기억이 있다. 엄마와 같이 이게 예쁘다, 남자아이니까 이게 어울리겠다고 말하며 함께 우현의 운동화를 골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결코 악의가 없는 질문, 그러니까 왜 새 운동화를 신지 않았느냐고 묻는 질문에 흘러나오는 대답은 더욱 퉁명스럽고 날카로웠다.'“이게 뭐 어떤데?”'낡고 해진 운동화는 진주가 신고 있는 반짝이는 구두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럴듯하게 옷은 차려입고 있어도 운동화만은 그러지 않았다. 차이라도 드러내 주는 것처럼 확연한 대조. 좋은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예쁜 미소와 다정한 말투. 소녀답게 움직이는 손 제스처 하나까지. 왜 우현은 그것들이 맘에 들지 않았을까? 아니다. 맘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니다. 마음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 이 무엇은 반드시 진주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던 것이다. 꼭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저와는 다르게 자라난 환경에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웃음을 짓는다. 어쩜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거지? 진주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눈이 휘어지고 보조개가 들어간다. 부러움, 시기, 질투, 동경. 그와 동시에 느끼는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무언의 갈증은 모조리 진주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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