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고 연애 할 생각 없어요?”'마른 수건으로 물기 있는 곳을 닦고 있던 슬기의 손동작이 멈추었다.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으며 옆에 왜 태진이 서 있는지 궁금하기만 할 뿐이다.'“방금 뭐라고 하셨는지…….”'“애인 있어요? 내 기억엔 없는 걸로 아는데…….”'“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그 사생활,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어요. 나하고…… 연애합시다.”'연애라는 말에 슬기의 두 눈이 태진의 눈을 향했다. 다른 날 같으면 눈이 아닌 얼굴 쪽으로 대충 쳐다보았겠지만 지금은 눈을 보고 있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시간부터 사람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지 알고 싶었다.'“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대타놀이는 그만하고 싶어요. 그 놀이는 한번만으로 족하니까요.”'“대타놀이가 아닙니다. 진짜로 연애를 하자고 제안하는 겁니다.”'“그러니까요. 왜 제가 유태진 씨 하고 연애를 해야 하는데요?”'슬기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태진을 향했다. 어제부터 친구로 있어 달라고 했다. 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남자의 눈빛이 안 되어 보여 친구로서 모든 얘기들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본의 아니게 밤도 지새웠다. 두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만 남들이 봤을 때 그다지 좋은 풍경은 될 수 없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젊은 여자가 있었다. 다른 방도 아닌 남자가 머무는 방에서 대책 없이 잠까지 잔 여자였다. '사실, 지금 슬기는 어서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그녀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시간 간격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태진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돈과 연관되어 있는 관계라고 하지만 젊은 남자와 한집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그런 남자가 이제는 연애를 하자고 했다.'“유태진 씨도 은민이 하고 같은 입장이세요? 혹시 집안끼리 거절하기 곤란한 만남이 있어요? 그래서 그 여자를 거절하지 못해 절 이용하고 싶으세요?”'“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유태진 씨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보이니까요. 다 가진 남자가 덜 가지고 있는 여자한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요?”'“목적이라…… 무슨 목적이 있을까요?”'“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선봤다는 그 여자분 때문인가요?”'태진은 잠시 생각에 젖어 갔다. 그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제 만난 게 전부다. 이번엔 자신의 생각과 전혀 상관없는 만남이었다. 의미 없는 만남……. 그래서 21번째란 맞선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건 슬기 씨가 잘못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하고 아무런 상관없이 제 감정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슬기 씨와 연애를 하고 싶어요.”'태진의 눈빛이 떨림과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만 퇴근하겠습니다.”'대충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서는 가방을 들어 현관 쪽으로 뛰어 나갔다.'태진은 죄송하다는 사무적인 용어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뛰어 나가는 슬기를 부르지도 못했으며 잡지도 못했다.'잠시 후,'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태진이 뛰어나갔다. '현관을 열고 뛰어 나가던 슬기가 계단을 헛디뎌 넘어졌다. 이미 손과 무릎에선 피가 나고 있었으며 옷들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태진이 슬기를 부축해서 다시금 돌아왔던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슬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진에게 몸을 기댄 채 들어갔다.'태진은 슬기를 의자에 앉혀 놓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힘차게 뛰어 나가다가 넘어진 탓에 무릎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종아리를 타고 흘러갔다.'“달리기를 잘 하나 봅니다.”'“학교 다닐 때 운동을 잘했어요. 그 중에서 달리기하면 절대로 빠지지 않았으니까요.”'이런 상황에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우스워 보인다는 생각에 태진이 웃었다. 지금은 마음 편하게 웃음이 나왔으며 더 이상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이 웃음을 숨기기 위해 날카로운 눈빛도 보였는지 모른다.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도 내었는지 모른다. 다른 조건들을 내세워 여자의 기를 죽였던 그였다. 그런데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는 사람은 자신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달리기 잘하는 여자는 싫은데…….”'“네?”'“나는 달리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말로 하면 달리기를 못해요. 그런데 슬기 씨가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니까 긴장이 되는데요. 너무 잘 뛰면 잡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 달리기, 나하고 있을 때는 달리지 말아요.”'슬기는 이미 따뜻한 눈웃음을 지은 채 소독을 하고 있는 태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이젠 내 얼굴이 보입니까? 내가 웃고 있는 눈웃음도 보여요?”'태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슬기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차가운 말투로는 이 여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따뜻한 웃음만을 보였다.'“치료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손도 아프고, 무릎이 아파서 여기에 더 있을게요. 하지만 곧 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하신 제안은 듣지 않은 걸로 하고 싶어요.”'“다 들었는데 어떻게 듣지 않은 걸로 할 수가 있는지.”'태진이 고개를 들어 슬기를 쳐다보았다. 서서히 모아지는 눈동자가 어느새 슬기의 눈동자를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슬기의 눈동자는 태진의 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당황함과 놀란 표정을 짓던 슬기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내 태진이 슬기의 손을 잡았다.'“너무 성급하게 슬기 씨 손을 잡았어요. 무례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고 싶어요. 내 눈을 피하지 말고 날 똑바로 쳐다봐요. 지금 내가 장난치는 것으로 보여요? 언제부터인지 나도 몰라요. 어느 순간, 갑자기 슬기 씨가 들어오고 있었어요. 처음엔 거부도 했고, 아니라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앞에 당신이란 여자가 있었어요.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기에 밀어 낼 수도 없었어요.”'슬기는 진지해져 있는 태진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눈을 아래로 향했다.'“날 쳐다봐요. 슬기 씨는 아닌가요? 나만의 착각인가요? 나한테 조금도 마음이 없어요?”'슬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 남자가 말하는 조건이란 것을 두고 보면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외형상 조건부터 이 남자가 가지고 있는 뒤의 배경까지 뭐하나 부족할 게 없는 완벽한 남자이었으니까. '그런데 슬기로선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의 얼굴이 불편했다. '“유태진 씨 같은 남자가 연애하자고 하는데 거절할 여자는 없겠죠? 저도 싫지는 않아요.”'유태진이란 말을 붙이는 게 어색하고 듣기 싫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말에 태진도 다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만의 생각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슬기의 말은 다른 방향으로 벗어났다.'“무슨 생각이 들어 저하고 연애감정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 감정,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아마 선을 보면서 많이 지쳐서 저한테 잠시 다른 감정이 생겼나 봐요. 물론 연애를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나는 싫어요. 연애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하는 게 아니거든요.”'“누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자고 했어요? 내 마음이 그러고 싶어요. 내 마음이 당신이란 여자에게로 향했어요. 나도 몰라요. 그렇지만 이대로 슬기 씨를 모른 척하며 지낼 수는 없어요.”'“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나요? 그 시간이 짧듯이 그 감정도 빨리 사그라질 거예요.”'“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