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기다려 달라 기다려 달라 해서 기다린 게 벌써 서른하나야!'“제 생활이에요. 제 삶이라고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다니까요.”'- 신경을 쓰지 마? 네 할아버지 하루라도 증손자 보고 눈 감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라는 놈이! 어떻게 신경을 안 써!'“아, 어머니!”'- 이게 무슨 배은망덕한 불효야! 네 어미랑 아비가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죄송스러워서!'신경질적으로 꽥 질러대는 날카로운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 현우는 재빨리 휴대전화를 귀에서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는 더욱 앙칼지고 매섭게 그의 귓가에 쏟아졌다.'- 여하튼 이번 주 내에 그 처자 올려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네? 뭐, 뭐라고요?”'- 할아버지가 자리 마련한 걸 번번이 바쁘다 어쩐다 핑계로 걷어찬 게 누군데! 네 할아버지가 순순히 넘어 가실 줄 알았어? 아! 나도 모르겠다. 김씨 가문 호적에서 파이기 싫으면 알아서 해!'“어머니! 어, 엄마! 엄마아!”'툭 끊겨진 휴대전화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현우의 손이 스륵 내려가며 그의 인상이 똥 씹은 것처럼 굳어져갔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은 막을 도리도 없이 땅이 꺼져라 크고 굵은 음색으로 방안을 가득 메웠고, 그는 손으로 얼굴을 벅벅 비벼대며 침대로 훌쩍 뛰어 올라 매트릭스 위를 사정없이 두들겨 댔다. 아니 두들겨 팼다.'스물여덟. 지긋지긋 했던 집을 벗어나 독립을 했던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학교에 매여 있고, 거기다 플러스 옵션으로 2년은 나라에 매여 있었다. 성인이 된 이래 한 번도 자유다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현우였다. '엄격했던 조부(祖父), 그를 꼭 닮았던 아버지. 그나마 숨구멍이 돼 주었던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현우는 여전히 본가에서 두 남자의 득달같은 잔소리를 받아가며 매여 있었어야 했다. 그 ‘잔소리’의 종류가 다른 방향이었다면 조금은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앞으로의 진로라든지, 재산관리라든지 기타 등등 그의 미래를 위한 조언이 될 만한 일이였다면 귀를 기울였을 테다.'하지만 그들의 ‘잔소리’를 가장한 ‘요구사항’은 단 한가지였다.'‘결혼’'‘연애’가 아니다. 무조건 ‘결혼’이었다. '말도 안 되게 강압적인 그들의 권력행사에 현우가 스물여덟에 꺼내 든 카드가 바로 ‘독립’ 이었다. 결혼도 여자가 있어야 했고, 여자가 있으려면 자유가 필요했다. '매일같이 정각 밤 10시가 되면 관등성명이라도 하듯 현우는 방안에 다소곳이 이부자리를 깔고 가부좌를 튼 채 아비와 조부의 삼자대면을 해야 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낚시 이야기와, 그들이 좋아하는 바둑 이야기와, 그들이 좋아하는 경제, 사회, 정치 이야기를. 현우는 근 2시간은 귀만 열어둔 채 유체이탈을 경험해야 했다.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힘든 밤이 지나면 새벽 6시 칼같이 일어나는 두 남자들의 기상시간에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는 1초 기상을 해야 했으며, 뒷산 약수터에서는 삼대(三代)가 나란히.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볼 정도로 창피한 ‘체조’를 가장한 ‘지옥훈련’을 현우는 통과해야 했다. 윗몸 일으키기, PT체조, 2단 줄넘기 및 영화 ‘록키’를 연상시키는 복식호흡을 동반한 격한 운동, 각종 약수터의 운동기구 섭렵하기 등등. 육체적 피곤을 감당해야 했다.'어릴 때는 그저 남자니까. 강하게 키우시려고.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다 싶었다. 덕분에 규칙적인 생활과 혹독한 운동으로 쭉쭉 자란 키가 185cm를 훌쩍 넘었고 탄탄한 근육이 옷맵시를 살려주고 있으니 그걸로 위안 삼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해가 지날수록 그들의 요구는 더더욱 심해지고 독해져갔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들의 목적이 단순 ‘건강증진’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 군대에 막 제대한 후 남들 다 놀고먹는 야심한 시각에 편하게 술 한 잔 할 수도 없고, 그 흔한 클럽이고 나이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우가 정말 큰 결심하고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며 큰소리 냈던 그날. '굵직하게 엉덩이에 그어진 야구방망이의 붉은 흔적과 초연히 말을 잇는 그들의 대답을 잊을 수 없었다.'“날 정자 왕으로 만들겠다고. 나 참…….”'침대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아 천장을 바라보며 현우가 길게 한숨을 뽑아내었다.'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인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현우 역시 하나 밖에 없는 장손이었고, 그의 아비 마찬가지이고, 그의 조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삼대독자.'하지만 그들은 모순되게도 현우에게 ‘남중남고공대군대’ 콤보를 날렸고 여자라곤 눈 씻고 찾아보지도 못할 그 환경에서 ‘결혼’만을 강요하는 그들에게 이듬 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물론 표면상의 약속은 ‘서른이 되기 전 며느릿감을 데려 오겠다.’ 이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의 대학 선배 규식과 자그마한 회사를 차리게 된 것이 계기였다. 해 왔던 일과, 자신의 전공과 전혀 무관했던 분야였던지라 현우는 망설였지만 많은 경험이 있었던 규식의 안목을 믿었고, 그런 규식은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현우의 성품을 믿었기에 그들의 동업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후배 유준이 사업에 동참하게 되면서 남자 셋이 운영하는 작은 ‘광고기획사’가 설립되었다. 나름 그 바닥에 입소문이 나있던 규식 덕분으로 여럿 거래처들을 손쉽게 따올 수 있었지만 한 번의 결과물이 열 번의 의뢰를 결정짓는 그 곳에서 여자와 자유는커녕 일에만 묻혀 산 3년이었다.'하지만 아무런 제약 없이 외박을 해도,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아침마다 칼 기상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현우에겐 더할 나위 없는 태초의 에덴의 동산 속 아담의 기분을 만끽했는데 드디어 그들의 태클이 들어온 것이었다.'늘 그래 왔듯 ‘결혼’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여자’를 찾겠다 응수한 현우를 더 이상 빠져나올 구멍이 없도록 새로운 카드를 제시했다.'그 ‘여자’ 여야만 했다. 무조건.'“계신가예! 안에 누구 있습니꺼!”'기막힌 과거 회상 중, 우악스런 현관문의 쿵쿵거림에 현우는 부스스 일어나 뚜벅뚜벅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누구세요?”'“안봉순입니더, 봉순이예.”'진하게 전달되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순간 엄습해 오는 등골의 오싹함이 말해주고 있었다. 꼭 그 ‘여자’ 여야만 했다. 무조건.'‘봉순’ 이어야만 했다. '참말로. 돌아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