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안은 분주하기만 했다. 기획3팀의 지우는 자신의 상사인 부장이 하는 말을 처음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 지우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온전히 지우가 기획하고 승인받아 진행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만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부장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우는 처음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라서 이것에 따라 승급이 좌우되는 그런 사안의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해 할 수 없는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오늘 중으로 2팀의 방 대리한테 다 일임하도록 하세요.”' “부장님!” ' 수긍 할 수 없는 결정에 지우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 “아, 알아요. 이 대리. 자신이 하던 거 마지막까지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어쩌겠어. 이 대리나 나나 회사가 그렇게 하라면 해야지 별 수 없잖아. 인사과에서 그렇게 하라고 연락이 왔어. 그러니 이 대리는 방 대리가 일임 받아 일하는 데 지장 없게 모든 자료 넘기고 브리핑도 확실하게 하는 거 잊지 말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대리는 내일부터 전무이사실로 출근하는 겁니다.”' “전무이사실이요?” ' 생각지도 않았던 발령소식에 지우가 멍한 채 부장에게 되물었다. 그도 그런 지우를 이해 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네. 이번에 김동하 전무이사께서 귀국하는 것은 들어서 알죠?” ' 지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원으로서 어떻게 이처럼 민감한 사항을 모르겠는가. '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와 무슨? 그렇다면 정말 제가 그리 발령이 났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조금 급작스럽긴 하지만 인사과에서 그렇다고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김 전무님께서 귀국하시면서 기존의 팀과 다르게 새로운 팀을 꾸리는데 이 대리가 뽑혔다는군요. 그러니 지금 손대고 있던 그 프로젝트는 얼른 정리해서 방 대리한테 넘겨주도록 해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 회식이나 합시다. 어찌되었든 이 사무실로 출근은 오늘이 끝이니 서운한 거 인사는 해야죠?” ' 결정사항을 납득할 수는 없지만 부장의 말이 사실이다. 회사가 사원에게 그렇게 하라면 해야지 별 수 있겠는가. 지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 전무이사실로 출근한 지우는 조금 낯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근무했던 많은 사람으로 정신없는 기획팀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차분한 사무실이었다. 차분하다 못해 조용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런 비서실에서 근무를 해 본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이곳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에 다른 여직원들은 그녀를 부러움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지우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발령 공고도 없이 그저 전무이사실로 출근하라는 전화 통지만을 받고 이곳으로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식의 인사발령이 기존에는 없었다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지우 앞에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 “이 대리님!” ' 작년에 입사한 홍보실의 새내기 김연아가 지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 “아! 연아 씨. 안녕. 연아 씨도 이리로 발령 난 거야?” ' “네. 이 대리님께서 오셔서 너무 좋아요. 어느 분이 오시나 사무실로 오는 내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지우가 엷게 웃음을 띠었다. 홍보실에 있던 신입사원 연아가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지우도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는 유쾌하고 발랄했으며 아주 예뻤다.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도 예뻤다. 사람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그동안 자신이 지켜 본 바로 연아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예쁜 여자들이 의례 갖는 내숭이며 가식이 보이지 않아 편했다. 그런 연아와 같이 근무한다는 것은 지우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우는 성격상 털털하지도 못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스타일이었다. 그런 자신과는 반대인 연아가 같이 있는 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에 가까운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이 손발 맞추어 일은 해야 하는 입장에서 무척이나 다행이다 싶었다. 연아는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가진 아가씨였다. 부러운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신입사원이며 그녀의 젊음이 풋풋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했다. ' 옛날 자신의 신입 때도 저랬을까하고 잠깐 생각에 빠지다 얼른 현실로 돌아 왔다. 오늘 같은 날 과거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연아와 둘이 서로의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어 가고 있을 때 인사과의 김영석 부장이 낯선 남자 직원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자. 다들 안녕하신가요?” ' “부장님도 안녕하세요?” ' 연아는 밝게 인사를 하고 지우는 부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 다 같이 인사들 하지. 이제 함께 일해야 하는 전무이사실 식구들이니 인사하고 마음 맞춰서 열심히 해봅시다. 이쪽은 정주호 과장. 런던 지사 근무하다가 이번에 본사로 왔어요. 이쪽은 이지우 대리. 그리고 김연아 씨.”' 부장의 소개에 따라 그들은 서로에게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정주호 과장은 과장이라는 직급에 비해 젊고 호남형에 미소가 시원스러운 남자였다. 그는 연아에게는 의례적인 웃음을 보이며 인사 했지만 지우에게는 한동안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 “오늘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전무님 오시기 전에 미국에서 넘어오는 모든 자료 미리 정리 준비하시고 도착하신 다음 전무님 스케줄에 맞추어 국내 일정을 소화하시는데 무리 없이 하는 것부터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익히 들어서 아시겠지만 전무님 실수 같은 거 용납하시는 분 아니니 철저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하실 때는 무섭게 몰아치시는 분이라니까 미리 각오들 단단히 하시는 게 좋아요. 전무이사실 총괄체제는 미국에서부터 전무님을 보필하던 정세영실장님이 맡아서 하실 것이고 해외 업무 파트는 정주호 과장이 맡고 국내에서의 기획과 일정 조정 등은 이지우 대리가 맡아서 해주기 바랍니다. 연아 씨는 정 과장과 이 대리 잘 서포트해주시고요. 아마 자료양이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자자! 어서 일 시작들 합시다. 이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