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양반이니라. 상민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양반이니라. 조정에서 행세깨나 하고 있는 치들도 근본을 따지면 진정한 양반이라고 할 수 없는 당금의 정한국正韓國에서, 구중궁궐의 상감마마와 곤전마마를 제하면 너희들이 고개 숙여 극진히 공경할 신분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라.'기와 얹은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볏짚 엮어 지붕을 인 초가 한 간에 세 식구 적을 두어 살고, 부리는 앗보치 하나 없는데다가 요기할 거리가 없어 삼순구식 하는 처지요만, 그렇다고 어찌 근본이 변하겠으며, 저고리 할 돈이 없어 상민이 입던 것을 기워 걸치게 하고 굴레와 타래버선 한 번 씌워보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반상班常의 유별함이 변하겠느뇨?'어깨를 곧게 펴고 발끝에 힘을 주어 걸음은 호접(胡蝶)처럼 가븨얍고 우아하게. '손과 시선을 경망스레 놀리지 아니하고 다소곳하게 두어 자태는 일일화처럼 청조하고 가련하게. '턱 끝을 당기고 허리를 소소 세워 거동은 녹경綠卿처럼 당당하고 위엄 있게. '언제, 어디에서, 므스것을 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너는 순충분의좌명 개국공신 이극렴의 증손녀니라.''머리 여물은 후 어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인간구실을 하고 산 지 몇 년이나 되었겠느냐마는, 맹세컨대 재야는 사리분별을 하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양반의 신분에 부끄러운 거동을 아니 하였다. 허니 이번에 처음으로 양반의 신분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다. 재야는 치마 깁즈기 오골계를 감싸 안은 채 밧비 걸음을 옮기었다. '한 번의 삿된 행동일 뿐이다. 수없이 품었던 삿된 마음 중 실행에 옮긴 단 한 번의 행동. 이리 하면 아니 되는 줄 알고 있으나 산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미안하오, 미안하오.’'마음속으로 되뇐 재야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모도 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 어디에도 시선을 둘 수 없었다. 절로 허리는 구부정해졌고 시선은 불안하게 움직였으며, 두 손은 방정맞게 떨리었고 발걸음은 성급해졌다.'평소보다 밧비 움직였으나 집은 아득히 멀었다. 재야는 이상하리만치 지친 몸을 이끌고 당도하여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에 솥을 걸고 불을 때었다. 솥에 물 받는 소리를 들었는지 창호지 너머로 류 씨 부인이 물어왔다.'-이게 무슨 소리더냐.-'매가리 없는 목소리였다.'“별 일 아닙니다.”'바른대로 고하면 입에 대지 아니할 것이 자명했기에 재야는 얼버무린 다음 슬그머니 치마 속의 오골계를 꺼내었다. 꾸지람이야 듣겠지만 일단 상에 올리면 아까운 요깃거리를 물리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다. '유달리 오골계의 반항이 심하였다. 파드닥 소리가 창호지 너머로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던 재야는 실수로 오골계를 놓쳤고, 기회다 싶었는지 오골계는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재야가 크게 당황하여 치마로 오골계를 감싸 안았을 때, 문지방 너머에서 류 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으로 들어오너라.-'오골계를 솥 안으로 밀어 넣은 후 발걸음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재야의 꿍꿍이를 훤히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류 씨 부인이 이어 말하였다.'-삿된 생각일랑 말고 안고 오너라.-'결국 재야는 치마로 오골계를 감싸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라비 재윤의 부축을 받아 류 씨 부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찌 몸을 일으키십니까.”'“누워서 자식을 훈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진저.”'류 씨 부인은 기어코 허리를 소소 세운 다음 한쪽 다리를 세워 그 위의 팔을 걸쳐 앉았다. 병든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곧은 자태였다. 재야는 대경하여 황급히 말하였다.'“누우십시오. 육신에 무리될까 저어되옵니다.”'석 달 열흘을 앓아누운 류 씨 부인이었다. 어렵사리 모신 의원은 류 씨 부인의 병은 다름이 아니라 굶주림에 모든 원인이 있다 하였다. 재야가 오골계를 훔쳐온 연유도 류 씨 부인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맥이 가늘고 숨이 옅으니 이러다 정말로 사달이 나겠구나 싶어서였다. '“그 닭은 어느 네의 것이더냐?”'재야가 입을 감믈고 대답하지 아니하자 류 씨 부인이 재차 말하였다.'“말하여라.”'“옆 동리 삼식이네의 닭입니다.”'“그리 멀지 아니하구나.”'류 씨 부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말하였다.'“돌려주고 오너라. 주인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아니하여야 한다.”'“어머니, 삼식이네는 십 수 마리의 닭을 가지고 있으니 이 한 마리 없어졌다 하야 큰 곤경에 처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본디 우리의 것이 아닌 물건이다.”'재야가 설득하였으나 류 씨 부인은 요지부동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류 씨 부인의 목소리에 애가 타 재야는 급히 덧붙였다.'“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대로 푹 고아 먹은 다음 뼈를 뒷마당에 묻으면 그 누구도 모를 일이옵니다.”'“낮말은 새가 알고 밤 말은 쥐가 들으며 본디 손으로는 한울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거늘, 어찌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미혹에 빠져있는 것이냐?”'“대오 각성한 성인들의 가르침 또한 마땅히 옳고 따라야 하지만 그전에 한울의 법도가 있으니, 한울은 사인여천事人如天하여야 한다 했습니다. 하여 사람 목숨이 한울만큼 귀중한데 그 목숨 보전하기 위하야 저지른 것이 어찌 죄가 되고 미혹에 사로잡힌 행동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한 치도 물러나지 아니하는 재야를 바라보는 류 씨 부인의 눈경이 엄해졌다.'“한울을 우러러 양가의 규수로서 스싀로가 한 행동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것이더냐?”'재야는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쥐어짜내듯이 말하였다.'“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였으니, 소녀 비록 오늘 양반의 도리에 어긋난 거동을 하였으나 한울께서도 눈감아 주실 것입니다.”'“아직도 깨닫지 못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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