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 이른 비가 내렸다. 길옆으로 아직 갈 길을 가지 못한 눈이 여기저기 밟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쏟아지는 빗줄기에 스러져갔다. 2월 중순. 아직은 조금 더 눈이 내려도 좋을 날씨였고, 조금 더 난로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은 시기였으나 이르게 내린 비가 봄을 재촉하였다.'타다닥.'스산해진 골목길에 서현의 뛰는 소리가 세찬 빗소리에 묻혀 사라져갔다. 붉은색 더플코트를 벗어 무언가를 감싼 서현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조금이라도 젖을세라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를 가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얀 다리 위로 물줄기가 연신 흘러내렸고 젖은 긴 생머리는 교복에 들러붙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드디어 저 앞으로 자신의 집이 보였다. 목적지가 눈앞에 가까워 오자 서현은 출발하려는 기차를 향해 뜀박질하는 여행자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숨이 턱에 차올랐고 돌아오는 내내 달려오느라 몸은 기진하였다. 그러나 서현은 더욱 힘을 냈다.'“후아!”'이내 서현은 자신의 집 대문 앞까지 뛰어 들어갔다. 대문 아래로 있는 작은 돌계단 위에 오르자 튀어나온 차양 덕분에 머리 위에서 내리치는 비가 사라졌다.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그 집은 누가 보아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태가 났다. 담장에서부터 대문 위의 차양까지 제멋대로 자란 넝쿨이 무성의하게 얽혀 있었고 칠이 벗겨진 대문은 드러내기 싫었던 치부처럼 벌건 녹을 그대로 드러내어 흉물스러웠다. 몇 해 전 지나가는 취객에 의해 부서진 초인종이 덜렁거렸다.'이미 다 젖어버린 가방에서 젖은 손으로 열쇠를 찾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방의 내부까지 빗물이 들어와서 교과서들이 흠씬 젖었다. 가방 속으로 손을 밀어 넣자 물에 젖어 위태하던 교과서의 표지가 조금씩 밀려 내려가 찢겼다. 하지만 서현은 열쇠 찾는 일에 더 몰두하였다.'잠시 후 손에 열쇠가 잡혔다. 얼른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고 싶었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택시조차 잡히지 않아 달려온 탓에 몸도, 교복도 온통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현은 한 손을 뻗어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으며 팔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려 하는 코트 덩어리를 들썩, 다시 고쳐 안았다.'삐거덕,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서현은 숨을 깊게 내쉬며 문턱을 넘었다.'툭, 발치에 뭔가 부딪혔다.'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반은 젖은 채로 아무렇게나 던져진 신문에 잠시 한숨을 내쉬고 허리를 굽혀 신문을 주워들었다. 신문 1면 귀퉁이의 붉은색 기사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현의 눈가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비운의 바이올리니스트 장화란! 그녀는 대체 어디에?'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사고가 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언론은 아직도 화란을 놓지 않았다. 서현은 거칠게 신문을 대문 밖으로 내던졌다. 바닥에 던져진 신문이 삽시간에 흠뻑 젖어들었다. 다시 쾅, 대문을 닫는 소리가 빗속에 파묻혀 사그라졌다.'서현은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후 계단 밑으로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오자 서현은 가슴팍에 품었던 더플코트로 감싼 것을 드러내었다. 갈색의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서현은 더플코트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코트 자락으로 케이스의 물기를 닦아내었다.'만지면 깨어질 유리 작품을 건드리듯 서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케이스를 열었다. 보라색 벨벳의 틀에 고정된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현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그것을 쓰다듬어 보았다.'어머니를 의식해 바이올린을 숨겨두고 학교에서만 연습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되었다.'초등학교 입학 후 아버지를 따라가 보았던 엄마의 연주회에서 서현은 바이올린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 작은 악기가 사람에게 주는 전율과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의 손에서 저렇게 깊고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사실은 어린 서현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