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기담 : 사미인

“어쩐지 가을의 끝 같은 아침인 걸.”'문을 열고나서 들이쉰 첫 공기의 맛에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벽 무렵부터 희미하게 안개가 자라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피부로 달려드는 아침 공기는 안락한 잠자리에서 헤아려 본 것보다 더 촉촉했다. 사박사박. 구두 아래에 밟히는 흙들이 젖은 모래 같은 소리를 냈다. 밤은 그토록 싸늘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사느란 기운도 곧 풀릴 것이다. 아직 안개 때문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올려다본 동쪽 하늘에 수줍은 척 숨어 있는 해님이 보였다.'무주(霧州)의 아침 안개. 상당히 그리웠던 것이다. 나름 감회에 젖었다. 내 선택에 만족했다. 이곳에 돌아오는 것이 또 한 번 후회할 거리를 자초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중 일은 어찌 되었든 지금 보게 된 안개만으로도 웃을 일이 생겼잖은가.'발아래 밟히는 흙의 소리와, 가르고 나갈 때마다 내게 안겨들며 살며시 피부를 만지고 지나가는 물기 섞인 공기를 만끽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그동안 많은 게 바뀌었지만, 그대로인 것들도 있다. 내가 그대로인 것처럼.'아니, 그대로인 것은 아니고 아주 느리게 변하는 것들일까나.'아직 잘 모르겠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생각해 보아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란 것이 있다.'백 살 때는, 앞으로 백 년 후엔 지금보다 배는 더 영리해지겠구나 했지만 삼백 살이 되어도 백 살 때에 비해 두 배 더 영리해지진 않았다. 애초에 타고난 머리가 그다지 영리한 편이 못 되었던 것 같다.'다가오는 춘분에 나는 사백 살이 된다.'태어났던 무주에서 사백 살 생일을 기념한다는 일. 너무 인간스러운 일일까?''*''“여기가 네 자리야.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나 아니라도 우리 반 애들 다 좋은 애들이니까 누구한테든 물어.”'“고마워, 반장.”'“미주라고 불러. 다들 반장, 반장 해대는 거 신물 나는 사람이야, 난.”'“그야 네가 중학교 때부터 내내 반장만 해서 그런 거잖아. 살다보면 살아온 길 때문에 이름이 바뀌기도 하는 거야. 아, 난 송옥이야. 차송옥.”'내게 자리 안내를 해 준 은테 안경을 낀 반장의 어깨에 턱하니 목을 올려놓으면서 말을 건 아이는 동그스름한 눈이 놀란 다람쥐 같은 구석이 있는 여자애이다. 조금 새치름한 면이 있는 반장에 비해 송옥이라 자신을 밝힌 아이 쪽은 혈색 좋아 보이는 발그레한 뺨만큼이나 입술도 붉고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류반희. 이름이 예쁜 애들은 보통 얼굴이 이름 못 따라오는데, 넌 그럴 걱정은 없겠구나. 서울에서 와서 그런가 딱 보기에도 세련된 느낌이고.”'“고마워. 좋게 봐줘서.”'적당히 웃어보이고서 나는 책가방을 열고 정리를 시작했다. 며칠 전에 받은 시간표대로 챙겨온 내용물을 책상 서랍에 다 넣고 국어책이며 노트만 따로 꺼내 놓는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마다 따라붙는 시선들이, 조금은 거슬렸다.'슥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애들은 눈이 마주쳤어도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개중엔 손을 흔들거나 윙크를 하며 내 눈에 띄려고 하는 아이도 있다. '무주가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전학생이 왔다고 이토록 반가워하는 게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다. 고등학교 2학년이 아니라 초등학교 2학년들 같다. 물론 초등학교엔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초등학교 2학년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래도 삼십 년 전에 인천에서 학교를 다닐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다르다.'희한한 게,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전한다고 하는데 사람의 아이들은 놀랍도록 유치해져 가는 것 같다. 두보의 시처럼 사람의 나이 70이 되는 것이 예로부터 드물다고 말해지던 그런 시절에 비하면 놀랍도록 오래 살게 된 사람들. 늘어난 수명만큼 머리가 자라는 속도는 더뎌지는 걸까?'어쨌든 이런 애들이 자라서 세상이 발전한다는 게 참으로 묘하다. 사람이란 다 알았다 싶다가도 가끔 내게 이런 놀라움을 안겨준다.'그러니 보통 이십 년 주기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이렇게 사람의 학교를 다니기로 한 일은 번거롭긴 해도 도움이 된다. 사람은 멀리서 바라보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동물들인데, 그 안에 있다 보면 또 아주 엉터리들도 아니라서 역시 신기한 것이다. 복잡다단하고,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욕망들로 부대끼는 동물. 참 재미있다.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것은.'1교시 시작 전의 예비종이 울렸고, 잠깐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조회가 있었다. 새삼스레 전학생 소개가 있어서 나는 교탁 앞으로 나가서 인사를 했다. 별로 재미는 없는 일이었지만 교실 안의 아이들 얼굴을 하나씩 전부 머릿속에 넣으면서 둘러보다가, 내 옆 분단에 있는 빈자리를 보았다.'“저기 빈자리는 뭐야?”'돌아와 앉은 뒤 짝꿍에게 물었더니 뭔가를 노트에 열심히 적던 단발머리 여자애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이름이 영미라고 했던가? 아, 명찰 보니 김영미가 맞다.'“아, 도련님이야.”'“응?”'“도련님 자리라고.”'영미는 도련님이라고 하면 내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열심히 노트 필기를 했다. 아무래도 어제 숙제를 제대로 안 한 모양이다. 나는 적당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하고 샤프를 꺼내 샤프심을 넣었다.'도련님. 무주에 오니 그리운 단어도 듣게 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이란 것은 내게도 통하는 것인지.'수업이 시작되었다. 국어 선생은 오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로, 유난히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 반에 전학생이 왔다지? 한 번 일어나서 34페이지 둘째 단락부터 읽어볼래?”라고 말했다. 설마 오늘 하루 간 있는 수업마다 이 비슷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길한 생각을 잠시 하면서 일어나 지목한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전학생이 책을 읽는 것도 신기한 일인지 여기저기서 힐끗거리면서 고개를 돌려댔고, 뭐라 뭐라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원치 않아도 여러 가지 말이 들려온다. 무시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마구 영리해지진 않은 대신, 그런 것에 대한 무심함이 갖춰졌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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