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은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 심연이라는 자에 대해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선하게 생긴 얼굴, 훤칠한 키, 다부진 언행을 보며 결코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올 때마다, 대진국의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고향에 온 듯한 마음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어른들에겐 언젠가는 고향에 갈 수 있을 거라며 대진국의 얘기들을 해주고 아이들에겐 풍습을 가르치며 고국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오는 날이면 아이와 어른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그를 기다리기 일쑤였다.'항상 붉은 옷을 입고 호위 무사를 대동하고 오는 심연을 보며 무명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궁 안에서 편안히 사시던 그가 이곳 당나라까지 쫓겨 와 이곳에서 숨어 지내며 결국 회한에 찬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 대진국의 대무예를 피해 이곳으로 온 이곳 사람들 모두가 그 당시 아버지를 따라온 무사와 시비들의 자손들이었다.'자신의 이름 ‘대무명’은 아버지인 대흠예가 이름조차 없이 조용히 숨 죽여 살아가라고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자신의 조부인 대문예가 대진국왕 대무예의 배 다른 형제로 태어나 정적들의 농간에 속아 전쟁에서 적인 말갈족과의 싸움을 미루어 대진국의 운명이 달린 전쟁을 패배하고 말았을 때, 대노한 대무예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순간, 적국이던 당으로 도망가 버리는 통에 궁에서 편안히 살던 대문예의 후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당이며 백제, 신라 등으로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지난날 자신이 이곳에서 아버지인 대흠예와 살면서 대진국으로 돌아가는 날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었던 나날이 있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꿈임을 알았다. 대무예가 죽고 그 아들인 대흠무가 즉위하면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오히려 대흠무는 당에 숨어든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면 당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더욱더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심연이라는 자가 꼭 자신의 아버지가 처음 당으로 왔을 때와 같은 복색과 행동을 하고 있음에 불안하였다. 그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에서 호위 무사를 대동하고 다닐 만큼 재물을 가진 대진국인이 있다는 것 자체도 들은 바가 없었고, 낮에는 보는 이들이 있어 오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이상했으며, 사는 곳을 말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심연을 믿기에는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게 했다.'“무명! 그대는 내가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오?”'“아니오. 심공 덕에 우리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오. 그런데 심공! 참 이상하오. 이곳 당나라는 대진국과는 적국이라 이곳에서 재물을 모으고 사는 대진국인이 있다는 소릴 들어 본적 없소. 그런데 어찌 심공은…….”'“하하. 무명. 그대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요즘 대진국과 당은 적국이 아니오. 그 정연인가 하는 대진국 공주와 당 월왕이 결혼을 하여 동맹관계가 된 이후로 대진국에서 많은 이들이 당에 와서 살고 있다오. 나도 그때 공주를 따라왔었소. 한번 바깥세상에 나가 보시오?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이오.”'“그러하오? 그 공주가 지금 월왕비로 있다 했소?”'“그러하오. 왜 그러오?”'“아니오.”'월왕부로 돌아오면서 홍연은 무명의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대진국 공주인 자신이 월왕비로 시집와 있다고 했을 때 놀라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적의에 차 보이기도 했다. 대진국 백성이라면 자신에게 적의를 가질 이유가 없음에도 분명 무명은 한순간 적의를 띤 눈빛이었다.'“진랑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무엇을 말입니까?”'“무명이라는 그 촌장 말이오.”'“그자가 어떠하다는 것이온지?”'“그는 분명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왠지 가끔 살기가 느껴지는지…… 진랑은 못 느꼈나요?”'“예. 전 그자를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러하오시면 더 이상 그곳에 가시지 않음이…….”'“아니오. 그래서 더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그토록 숨어사는 이유도 알고 싶고 왜 대진국을 떠나 왔는지 알아야겠어요.”'진랑은 왕비가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웠다. 월왕이 돌아오면 반드시 이런 왕비의 모습을 보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월왕이 얼마나 왕비를 사랑하는지 아는 진랑으로서는 부디 월왕이 무명을 상대로 속을 끓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무명이라?”'“전하. 무엇이라 하셨습니까?”'“아니다. 계속 말해 보게.”'“이번 말갈족의 요구 조건은…… 전하! 듣고 계시옵니까?”'“무어라 하셨소? 아니. 오늘은 이만 합시다. 내가 좀 피곤해서…….”'“예. 그러시지요.”'진 태감이 나간 후 이정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리에 앉아 이미 식어 버린 차를 마셨다. 월왕부에 남겨두고 온 홍연이 걱정스러워 내시 부사를 홍연 옆에 붙여 두고 왔는데 열흘에 한번 오는 그의 서신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늘, 그 서신의 내용은 자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한골의 무명. 처음 홍연이 자신의 고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자주 들러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잘 보필하라고만 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이었다. 그러나 지난 서신에서부터 무명이라는 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내시 부사의 걱정 어린 말이 이정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무명이란 자를 만날 때는 왕비께서 붉은 대진국 남복으로 변복을 하시고, 그곳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며, 밤늦도록 무명이란 자와 얘기를 나누시다 돌아오십니다!’'다른 그저 평범한 보고서일 뿐일 수도 있으나, 이정에겐 대진국 상경 저자에서 홍연을 처음 만난 그때를 회상하게 하였으며, 처음 자신이 그런 변복한 홍연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며칠 뒤 월왕에게서 친전이 온 것을 본 내시 부사는 당황스러웠다. 아직 한 번도 이토록 집요한 월왕의 글을 본 적이 없었다. 내시 부사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월왕이 자신의 왕비를 얼마나 연모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무명이라는 자의 모든 것을 알아보라! 또한 진랑으로 하여금 왕비를 호위함에 있어 단 일각도 따로 행동하지 말도록 하라! 내 곧 돌아갈 것이니 그때까지 왕비의 안전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라!”'내시 부사 한위는 진랑을 불러 왕의 밀명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주군이 머지않은 장래에 왕비에게 빠져 악귀라는 별호가 우스울 정도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마음이 뿌듯해져왔다.'''“무명! 그렇게 있으니 내가 아는 자와 많이 닮았구려…….”'“누구를 말이오.”'“내게 유일한 친우이자 가족인 사람과…….”'“그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했소? 왜 그런 슬픈 얼굴을 하시오.”'“그 사람은…… 생사를 모르오. 하! 괜한 말을 했구려. 무명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그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아마도 같은 대진국 사람이다 보니 닮은 것일 테지요.”'“아니…… 외양은 닮지 않았소. 외양은 오히려 월…… 아니, 다른 자가 더 많이 닮았소! 내가 말하는 건 외양이 아니라 행동과 품성 그리고 뭔가를 감춘 듯한 눈빛이…… 그러하오.”'“그건 심공이 잘못 본 거요. 난 감추는 것이 없소. 그러니 그와 닮은 것이 아니지 않겠소?”'“그렇구려! 그래, 그대의 부모는 대진국 어디에 살았었다 하오?”'“상경이오.”'“상경이라?”'“왜 그러오?”'“나도 상경서 살다 왔다오. 그곳에 있는 많은 이들이 날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그곳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사는 몰인정한 자들이오. 한때 목숨처럼 모신 이도 쉬이 잊어버리는 습성을 지녔으니…… 너무 기대하지 마오.”'“그럴까? 난 항상 그들이 보고 싶소. 무명은 아니 그렇소?”'“난 아니오. 그들을 아주 깨끗이 잊고 살고 싶소. 그래서 다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음 하오.”'“무명은…… 그들이 미운가 보군…….”'“그렇소. 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소. 나와 내 부모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어찌 좋아하겠소?”'“왜 죽이려고 하였단 말이오? 누가? 왜?”'“아니오. 심공과 관련 없는 일이니 그만둡시다. 자 그만 아낙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