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시원하다.”'하루 종일 여기저기 시달리고 나서 욕조에 한참 몸을 담그고 나니 기분이 풀리는 연우였다. 정란을 지켜주기 위해서 재석이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촉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도 피로한 이유 중 하나였다.'‘Rrrrr Rrrrr''“응?”'편히 앉아서 DVD를 보기 위해서 와인을 내려놓던 연우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의사라는 직업상 병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연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서연우입니다.”'“나야.”'그러나 연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병원이 아니라 정란의 전화였다.'“선생님!”'정란의 목소리에 연우는 용수철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튕겨져 일어났다.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였다.'“어떻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정란은 한 번도 먼저 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그거 먼저 전화를 하고 그가 먼저 그녀를 찾았다.'“뭐 해?”'“저요?”'“응.”'자기 위해서 가운만 입고 있는 상태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정란이 분명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 것이라.'“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요.”'“지금?”'정란의 의심스러운 목소리. 시계를 보고 아차하는 연우였다. 지금 들어왔다고 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늦어있었다.'“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더 이상 궁금을 표하지 않는 정란이었다. 잠시 정란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지금 우리 집에 올 수 있어?”'“지금 선생님 집에요?”'연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응. 우리 집 말이야.”'연우와 다르게 정란은 많이 차분한 모양이었다.'“나 서 선생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말이야. 그냥 전화로 하기에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라서.”'연우는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싫으면 말고.”'“아, 아닙니다.”'연우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선생님이 부르시는데 싫은 것이 어디 있어요?”'“강요하는 거 아니야.”'정란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그냥 서 선생 얼굴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전부니까,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피곤하면 거절해도 괜찮아.”'“아닙니다.”'어느새 가운을 벗고 다리 사이로 이런 날을 위해서 특별하게 미리 준비를 해놓았던 핑크색 하트가 엉덩이의 딱 한 가운데 박혀 있는 새하얀 드로즈에 다리를 꿰어 넣는 연우였다. 이런 날이 드디어 오는구나.'“지금 금방 갈게요.”'“기다릴게.”'“우왓!”'청바지를 입던 연우가 큰 소리를 내면서 뒤로 넘어졌다.'“서 선생!”'기다린다고?'“서 선생? 괜찮아?”'그러니까 지금 자기를 집에서 기다린다고 하는 거잖아?'연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집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이제 조금은 자신을 남자로 보겠다는 그런 의미인 것일까?'“서 선생 괜찮은 거야?”'“아, 네.”'그제야 전화기에서 계속 정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연우였다. 엉덩이가 깨질 것 같아 얼얼했지만 견딜 만 했다.'“지금 바로 갈게요.”'“어.”'그녀의 집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는 것일까? 어떤 의미인 것일까?'“아, 저기 부탁이 하나 있어.”'“부탁이요?”'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부탁을 하시려고요?”'“올 때 먹을 것 좀 사다주라.”'그 정도는 일의 축에도 끼지 않았다.'“네!”'“그럼 있다 봐.”'“네.”'전화가 끊기고 연우는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아니 도대체 왜 집으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라는 거야?"'어리지 않은 나이. 이 늦은 밤에 자기를 좋다고 하는 남자에게 먹을 것을 사가지고 집으로 오라고 하는 여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에, 아니겠지.”'하면서도 살짝 기대를 하게 되는 연우였다.'“그나저나 뭘 사가지고 가야 잘 사왔다고 하시려나?”'설레는 마음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