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갈기가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호흡하듯 같이 움직였다. 목울대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냉한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새하얀 김이 코와 입가에서 뿜어져 나오자 눈앞에 있던 사냥감이 반사적으로 날듯이 몸을 튕겼다. '청호(靑虎) 아무르는 노련한 포식자였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앞발이 사냥감이 지나간 자리를 밟았다. 이미 복작 노루는 시야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두 개의 앞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기지개를 켰다. '연한 하늘빛 눈동자가 흐린 햇빛 한 줄기를 받고 반짝였을 때 아무르의 거대한 몸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몸을 풀 듯 내딛던 발이 점점 속도를 더하자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눈 위에 새하얀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그 육중한 몸짓에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고 천지가 요동쳤다. '새하얀 일곱 가닥의 수염이 엄청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휘어져 털 깊숙한 곳에 묻혔지만, 아무르는 오직 사냥감이 지나간 그 길만을 쫓았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복작 노루가 이내 아무르의 시야 끝에 들어왔을 때 회심의 울부짖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크아아아앙!'공기를 찢어발기는 엄청난 소리에 복작 노루가 일순간 균형을 잃었다. 본래 가려던 곳이 아닌 검은 숲 쪽으로 노루가 방향을 틀자 더 이상 높일 속력이 없을 것만 같았던 아무르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그만.”'검은 숲 너머로 노루의 짧은 꼬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목소리가 들리기 전 아무르가 멈춰 섰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이 숲은 우랄산맥에 사는 모든 동물들이 꺼려하는 곳이었다. 허나 ‘그들’이 들어온 뒤로는 사냥을 하던 도중 번번이 이곳으로 도망가는 사냥감들 때문에 허탕을 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여기서부터는 우리 영역이야. 고양이는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크르릉.'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둘이었다. 앞발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아무르는 이를 가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숲 속에서는 아무르와 그의 동족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악한 자들이다. '“돌아가. 네 영역으로.”'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를 아무르는 이미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쫓기고 있다는 이들에게 이 검은 숲을 내어 준 것은 아무르였다. 이 넓은 시베리아 벌판에는 본래 청호(靑虎)와 흑호(黑虎)가 공존하고 있었다. 넓은 시베리아라 해도 그곳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장 한한 일족뿐이었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싸움 끝에 흑호들을 시베리아 땅에서 영원히 몰아냈다. 그들은 청호들이 이 땅을 지배하는 한, 결코 다시 이곳을 밟지 못했다. 그들이 지배하던 곳은 지금 마녀들이 머무는 검은 숲의 영역이었다. '주인이 떠나고 텅 빈 그 검은 숲에 마녀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그것은 오직 ‘계약’에 의한 관계였다. '영악한 이들에게 속아 ‘계약’을 하지만 않았어도 아무르는 숨기고 있는 이빨을 드러내 단숨에 여자의 목 줄기에 펄떡이고 있는 동맥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가 하늘을 향해 크게 한 번 울부짖자 두 여자의 시선이 그가 보고 있는 허공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르에게 돌아온 시선의 끝에 푸른 갈기를 가진 청호는 온데간데없었다.'눈처럼 새하얀 나신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설원을 닮은 얼음 같은 남자가 마녀들의 앞에 서있었다. '“과연 영물이라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만 하구나.”'붉은 머리의 여자에게서 짧은 감탄사가 터졌다. 계약을 했을 때 보고, 두 번째 보는 아무르의 모습이었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뿐. 본색은 한낱 미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여자는 발톱을 감추고 있는 그가 아무리 탐이 날만큼 아름답다 하더라도 믿지 않았다.'“언제까지 ‘계약’이 너희들을 지켜줄 거라 자만하지 말라.” '아무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아닌 붉은 머리의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의 언어였다.'“오호, 계약을 원한 것은 너희들이 아니던가.”'우랄산맥을 거쳐 전 시베리아를 공포에 떨게 하는 푸른 호랑이, 아무르를 이렇게 농락했던 이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없었다. 아무르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듯 그들 주위를 어슬렁거렸으나 붉은 머리의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돌아가래도.”'시베리아에 부는 얼음송곳 바람보다 차가운 분노가 아무르의 머리를 잠식했다. 하지만, 물러가야 할 때였다. 저들의 능력이 무엇인지 보고 겪은 아무르는 지금 무리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아무르의 하얀 나신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두 다리라 생각했던 손이 지면에 닿았을 때는 이미 짙푸른 갈기를 뽐내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였다. 그가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붉은 머리 여인의 옆에 있던 작은 계집아이가 입을 열었다.'“괜찮을까요?”'“더 이상 도발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 여기도 슬슬 떠나야겠구나.”'계집아이의 머리를 다정스레 쓸어주며 붉은 머리의 여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아무르의 뒷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그가 사라진 곳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1630년, 인간들의 무차별한 ‘사냥’을 피해 검은 숲에 은둔해 있는 수십 명의 여인들은 천지에 사는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고, 결계를 펼치고, 주술을 부릴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들을 ‘마녀’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