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혁은 혜아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혜아는 한번 같이 왔었던 남산의 그 난간에 서서는 몇 시간째 그 모습 그대로 말이 없었다. 겨울의 초입인지라 해가 짧아져 사람들 눈높이까지 석양이 내려와 있었다. 붉게 물든 석양이 혜아의 뒷모습을 더욱 가냘프게 만들어댔다. 세혁이 한 발자국 다가서려고 하자 혜아가 무언가 결심이라도 섰다는 듯, 당차게 뒤돌아섰다. 그 모습에 놀라 세혁은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세혁은 이 조그마한 녀석에게 벌벌 떨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아저씨”'“그래. 이제 말할래?”'“나랑 왜 결혼하려고 그래요?”'세혁은 지금 혜아의 두 눈을 응시하며 ‘몰라서 묻는 거야?’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이라 딱히 정의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의 규율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나 사랑해요?”'“사랑? 한순간에 지나가 버릴 그런 마음……그런 거 믿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해.”'“그냥 자고 싶은 게 아니고요?”'“그래. 거짓말하지 않을게.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그래서 너와 결혼할 거다.” '“허……큭.”'혜아는 살짝 눈을 흘기며 세혁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솔직한 그의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언제나 너무도 진지한 눈을 해서는 자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매력일지도 모른다고 혜아는 생각했다. '“아저씨. 그럼 딱 하나만 약속할래요? 그, 자고 싶은 사람. 나 하나면 안 돼요? 그럼 결혼해 줄게요. 뭐. 나중에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와서, 자고 싶어지면 나랑 헤어지고 해요. 그럼 용서는 할게요.”'“그럴 일은 없을 거다. 처음은 아니어도 네가 내 마지막 여자일 것 같거든.”'“너무 장담하지 마요. 장담하면 달라진 마음을 어떻게 주워 담으려고 그래요?”'“달라지지 않을게. 장담해. 넌 달라. 내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여자와도 달라. 아니 비교도 하고 싶지 않아.”'“치…….”'혜아가 세혁의 말에 입을 뿌루퉁하게 모으고는 다시 한 번 세혁을 흘겨보았다. 그런 혜아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너무 해맑게 웃어 눈이 안 보일 정도다. 혜아는 세혁에게 다가가서는 세혁의 슈트 앞자락을 두 손을 곽 움켜쥐고는 자신의 코앞까지 세혁을 끌어당겼다. '“정말……바람피우면, 나도 아저씨를 죽일지도 몰라요. 명심해요.” '혜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세혁을 더욱 끌어 자신의 입술에 세혁의 입술을 살포시 놓았다. 그러자 세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살포시 눈꺼풀을 내려 오랜만에 혜아의 입술을 맛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