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이환이 병실로 들어갔을 때, 이지는 등을 보인 채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푸른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지의 가냘픈 어깨가 오늘은 더 작아 보였다.'보호자용 침대에 앉아 있던 간병사가 그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상무님, 오셨어요?” '간병사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이지는 그대로 등을 보인 채 창 밖만 내다볼 뿐이었다.'“아직 점심 안 먹었지? 오빠가 이지 좋아하는 치즈케잌 사왔는데…….”'이환이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이지 옆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여전히 이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굳어진 이지의 얼굴은 일 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이지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환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옮겨졌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자상으로 입원한 지 사흘이 지났지만 이지는 자신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환은 양쪽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양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인 동생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 그런 아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의지해 왔던 사람이 그였다. 그런데 그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다. 관심이 있는 척만 했었다. 아마도 이지가 그것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이지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된 데에는 어쩌면 그의 무관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순간, 이지가 이대로 영영 마음을 닫아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이지를 바라보던 이환은 이지가 보고 있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꽃샘추위의 심술에도 불구하고 병원 한쪽에 조성된 정원에는 벚꽃들이 금세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퍼져가는 봄의 향기에 취해 꽃비를 날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정원 곳곳에는 벌써부터 이른 봄볕을 즐기러 나온 이들도 보였다. 막 습기를 머금어 파릇파릇해진 풀숲 사이를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환자복을 입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얼굴에서 따사로운 봄기운이 느껴졌다. '“이제 진짜 봄이네.”'이환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응.” '이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이지가 말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이환은 반가움에 이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지야.” '“저기 봐, 오빠.” '이지가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이지의 손끝은 작은 체구의 한 여자가 휠체어를 밀고 벚꽃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긴 머리를 말총처럼 질끈 처맨 여자의 얼굴은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햇살 아래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은 빛이 그대로 투과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맑고 투명해 보였다. 청바지에 흰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빛이 난다고 할까? 그 낯설고 생경한 느낌에 이환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아이 웃는 거, 참 예쁘지?” '“응?”'그제야 이환은 이지가 말하는 사람이 언니가 아닌 동생이란 걸 알아차렸다. 이환은 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이는 이지처럼 푸른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무색할 만큼 두꺼운 회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과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겨울나무를 연상시키는 왜소한 몸은 멀리서 보기에도 병색이 짙어 보였다. '“아는 아이야?”'“아니…….”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이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 애 뇌종양이래. 간호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 죽을 지도 모른대. 나랑 나이가 똑같은데…….”'이지의 얼굴에는 아주 잠깐 안타까움이 배어나왔다. 또래 친구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환은 이지의 작은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은 채 정원에 있는 두 자매를 눈으로 쫓았다. '아이가 뒤에 있는 언니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거칠고 창백한 얼굴에서 빚어 나오는 아이의 웃음은 투명한 물빛이 연상될 만큼 순수하고 해맑아 보였다. '휠체어를 밀고 가던 언니가 휠체어를 세우더니 동생 앞으로 돌아와 마주섰다.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리더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리곤 세상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시 후,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도 똑같이 따라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닫힌 창턱을 넘어 그들에게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예쁘지, 저 애?”'“그래, 예쁘구나.”'그때 이환은 언니 쪽을 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빚어내는 봄빛 미소를 보자 이환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오빠…… 난 저 애가 참 부러워.”'“왜?”'“행복해 보여서…….”'이지의 그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들려 이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앤…… 살아 있어서 행복한가봐. 나랑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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