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창문을 열면 더운 바람이 훅 불어 들어올 만큼 마음껏 무르익었다. 정원의 짙은 장미 향기가 저택을 감싼 아침,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경준은 눈처럼 하얀 드레스셔츠를 입으며 거울 앞에 섰다.'치열했던 대학 6년 동안에도 거르지 못할 만큼의 운동중독자답게 식스 팩이 선명한 배를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무심한 듯하지만 실은 어느 순간에도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은 보람을 이렇게 느낀다. '183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모델 뺨치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절대 빠지는 인물도 아니었다. 쌍꺼풀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부리부리하게 큰 눈하며, 우뚝한 콧날, 그리고 은근히 섹시하게 보이는 입술을 좀 보라. 게다가 이 피부란……. 모공 흔적 하나 없이 탄탄하고 매끄러워 본인이 봐도 놀랄 지경이다.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퍼플 계열의 타이까지 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이명옥 여사였다.'“뭐하니, 아버지 기다리신다.”'“내려갑니다.”'그는 방을 나와 어머니와 함께 이 층 계단을 내려왔다.'“첫 출근인데 기분이 어때?”'경준이 씩 웃었다.'“뭐, 특별할 게 있습니까?”'생판 모르는 곳도 아니고 아버지 병원인데 말이다. '보철전문의인 경준은 두 달 전 교수로 있던 치과대학에 사표를 제출했다. 임플란트(Implant) 심미 보철에 있어 동년배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능력을 가진 그를 대학병원 측에서도 무척 잡고 싶어 했지만 경준의 배경을 알고 있어 끝까지 잡지는 못했다. '강남 <유> 치과 병원. '경준의 새 직장이자 앞으로 그가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 병원이었다.'경준의 아버지 유철한 원장이 20년 전 개원한 강남 <유>치과 병원의 실력과 명성은 웬만한 대학 치과보다 더 유명한 곳이었다. 유철한 원장은 보철 전문의로서 30년 이상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유철한 원장의 재능을 경준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잘해라.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어머니의 당부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자 경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어머니가 그러실 때마다 제가 아직 일곱 살 아이 같은 기분이 드는 거 아십니까?”'그러자 이 여사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네 나이 칠십이 되어 봐라. 나한테는 아직 애일뿐이야.”'“어머니도 참.”'“애 소리 듣기 싫거든 얼른 장가가라. 애 아범 된 뒤에도 내가 그 소리 할까.”'“얼른 가시죠.”'아침부터 시작된 장가 타령에 경준은 얼른 현관으로 나왔다. 현관 앞에는 이미 아버지 유 원장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늦어서 죄송합니다.”'“가자.”'“네.”'더없이 무뚝뚝한 유 원장의 뒤를 조용히 따라 나갔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아버지와 함께 첫 출근을 한다. '기분이 묘했다. 오로지 실력과 뚝심 하나로 아버지가 세우고 번창시킨 병원, 앞으로 그가 책임져야 할 병원이었다.'강남 <유>치과 병원은 구강악안면과 외 총 8개의 진료과목이 있다. 오늘부터 경준은 그 중에서 보철 파트의 책임과장 의사가 되는 것이다.'10층짜리 병원 건물이 저 멀리서 보일 무렵이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유 원장이 그를 보았다.'“유 과장.”'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라 경준은 정중히 대답했다.'“네, 원장님.”'“앞으로 유 과장이 병원에서 어떤 짓을 하든 난 유 과장을 믿는다.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치과의사로서의 유 과장을 신뢰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단 하나.”'단 하나? '뜸을 들임으로써 다음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끌어올린 유 원장이 말을 이었다.'“유 과장 때문에 정 팀장이 병원을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땐 아들이고 뭐고 내 손에 개박살 날 줄 알아.”'지금까지의 근엄함을 한순간에 깨는 ‘개박살’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경준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하여튼 근엄이 10분을 못 넘긴다.'“아버지, 개박살이라니요? 이제 그런 말씀 안 하시면 안 됩니까?”'“내 맘이다. 이놈아.”'대한민국 최상위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어릴 적 두메산골 소년의 투박함을 그대로 간직한 유 원장이었다. '“절대 내보내면 안 되는 정 팀장은 대체 누굽니까?”'“너도 알 거다. 심미보철 파트 담당이니까. 정나진 알지?”'아, 그 정나진?'“네, 압니다.”'최근 치과기공계에서 정나진을 모르면 간첩이다. 포세린, 인세람, 라미네이트 할 것 없이 도재로 하는 거면 뭐든 완벽한 실물 색깔의 재현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마 전생에 청화백자를 굽던 도공일지도 몰랐다.'치과기공사 정나진. 치과의사의 오더를 받고 진료에 필요한 보철물을 제작하는 사람. '치과 의사가 많은 만큼 치과기공사도 많지만, 특별하게 뛰어난 치과의사가 귀하듯 특별한 솜씨를 지닌 치과기공사도 귀한 법이다. '사람의 입은 작다. 그렇게 작은 입 안에 이가 위아래, 사랑니까지 모두 합쳐 32개다. 그러니 치조골에 박힌 Root(뿌리)를 포함하지 않은 치관의 1～1.5㎝를 치료하고 제작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절대 기계의 힘으로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의 정밀한 손기술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관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명심해라.”'“명심하겠습니다.”'‘개박살’ 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솜씨를 타 병원에 빼앗긴다는 것은 강남 <유>치과 병원이 그 솜씨만큼의 경쟁력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인 경준은 앞으로 그가 물려받게 될 병원 역시 완벽하길 바랐다.''각 파트별 과장들과 인사를 한 후, 경준은 보철 파트에 소속된 여덟 명의 의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유경준입니다.”'소개를 하는 사람도, 소개를 받는 사람도 더 이상 다른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다름 아닌 병원장의 아들이니까.'“지금 임플란트(Implant) 보철 진행 중인 환자 파노라마와 CT, 그리고 술식 전후의 사진이 필요합니다.”'그러자 <유>치과 병원에서 3년차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최수영 선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첫날부터 진료하시려고요?”'“진료 시작하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나? 10분 내로 가져오도록 해.”'냉정하리만큼 차가운 어조에 최 선생의 목이 자라목이 되었다. '“네, 과장님.”'어디서든 초반 기선제압이 제일 중요하다. 하물며 올해 초부터 지금껏 담당 과장이 없었던 이곳에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타깃이 되는 건 무리의 대표자. 일단 그놈만 잡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