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에 꼭 조여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느슨해지거나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으면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능이 멈추고 만다. '하나 둘 몸의 기능이 힘을 잃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의욕상실이다. 뭔가에 집중을 해도 만족이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말을 하는 귀찮아진다. '펼쳐놓은 서류를 습관적으로 읽고 머리에 입력시켜 회의실에 앉아 직접 읽었던 것과 다르거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상대가 가슴이 아프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말거나 오직 자신의 감정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보고를 하는 이의 잘못인 것처럼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분노를 받아주는 도구 일 때가 많았다. 무섭다. 사람이 뭐 저러냐,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다는 말을 들어도 상처가 되지 않았다. 마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처럼 다가오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의 흐름에 익숙해지면서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버티어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신 안에 있던 고통은 생명이 끝이 날 때 끝나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그리움을 안고 사는 거라는 것을 그는 삼 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우진은 수현의 사무실로 향할 때마다 미친 듯 떨려오는 심장 박동을 늦춰보려 노력했지만 뛰는 심장은 쉬 말을 듣지 않았다. 하수현이란 여자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고 행복해졌다.'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를 안 보면 미칠 것 같아 급하게 차를 몰았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 빗길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수현에게 향하는 길이 빗길이 아니라, 꽃길이었다. 꽃길의 끝에 사랑하는 님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몽땅 사라져버린 것처럼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축 늘어져 있는 수현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나하나 그녀의 비밀이 드러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걸 풀어내기 위해선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도움이 가장 절실했다. '그녀의 성격상 자신에게 얘기를 해 줄 사람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알아보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녀 혼자만이 보였는데 지금은 그녀 주위에 어머니도 있고, 친구,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만 옆에 있으면 주위의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웃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그거면 족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모아 놓았다 생각하면 흩어져버리는 일이 다반사라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보고 있는 눈동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아. 숨 쉴 틈이 없잖아.”'쥐어짜듯 나온 말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듯 가슴을 감싸는 수현을 보며 우진의 마음은 그만하라고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도대체 그 자식 누구야.”'“친구.”'그 하나로 설명이 된 듯한 수현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오장이 뒤틀리고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친구?”'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 자꾸 되묻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왔는데 사무실 안이 떠나가도록 비명을 지르다니…….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른 거야?”'빈정거림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였다.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역시 자신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답이 없는 것에 더 화가 나는 것은 무엇인지…….'“넌 지금 그 개자식이 네 친구라고 말하는 거야?”'“친구였어.”'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말고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그녀의 대답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고 화가 났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감추며 심호흡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도면이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던지기만 해. 가만 안 둘 거야. 분노 좀 그런 식으로 풀지 마. 너 그러는 것 정말 싫어.”'“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자식 죽일 것 같은데!”'“네가 애야. 왜 그래.”'“너 같으면 열 안 받게 생겼어. 씨팔!”'우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화내는 것이 싫다 말하는 그녀의 말에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부풀어 오른 신경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많이 놀라 달래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마음뿐이었다. 감정의 흐트러짐을 감추고 있는 얼굴은 살짝 건드리기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지만 자신의 분노가 더 크다보니, 그녀의 감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가까스로 이성을 차린 우진은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있는 수현을 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쉴래?”'지금 날카로운 칼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대고 있었지만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를 끄덕이려다 말고 수현이 고개를 들더니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오늘 못 온다고 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무작정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에 집중 할 수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데 여느 때와 달리 힘없는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안타까움이었다. 강한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녀의 약한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궁금하지 않아?”'“얘기하고 싶어?”'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우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억지로 미소 짓는 것을 보며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아줄까?”'“아니야……. 응……. 모르겠어.”'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도리질을 하며 희미하게 웃었지만 뺨은 몹시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 되어 보여 얼굴을 쓰다듬자 기다렸다는 듯 품에 꼭 안겼다. 조금 전 남자가 왜 수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어 나가 그놈을 잡아 어떻게 된 것이냐며 따져 묻고 싶었다. '“우진아…….”'“왜?”'“집에 가고 싶어.”'“데려다 줄까?”'“음.”'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손을 꼭 움켜잡으며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다. 지금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수현에 대한 궁금증은 하루가 높아져갔고, 그녀에 대해 알아 가면 갈수록 모든 것이 비밀 투성이었다. 도대체 감춰야 할 게 뭐가 그리 많은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빗발은 점점 굵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힘없이 조수석에 앉는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