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애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가슴이 아프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단념이 되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품은 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해도 불행하게 될 뿐이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그녀는 아무하고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볼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 수 있다면 백작의 정부로라도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그것은 백작의 고결한 명예에 흠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는 것은 괜찮지만 백작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떠드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바스락.'뒤에서 소리가 들리자 애나는 털뭉치와 Jr. 24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넋두리를 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수녀원에 들어갈까.”'“그건 내가 반대한다, 밤비나.”'“!”'애나가 경악으로 물든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뒤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애나가 숲 속 길을 따라 달렸다. 백작이 이곳에 돌아올 이유는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머리와 옷이 흐트러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백작을 피해 도망쳤다. 길게 자란 수풀들이 방해를 하고 굽이 있는 구두가 걸음을 늦추었다. '“하아, 하아.”'공기가 부족해서 가슴에 답답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에 꼭 맞게 만들어진 구두도 돌부리에 치이자 어딘가에서 벗겨졌다. 발바닥에 와 닿는 간지러운 풀잎에 감촉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한 발을 더 떼려는 순간, 어느새 따라온 백작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처음 그에게 붙잡혔을 때 거세게 저항을 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를 달래려는 듯한 손길, 그리고 익숙한 체취에 애나는 저항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바깥으로 향하는 길목을 응시했다. 애나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놓아주세요.”'백작은 도리어 그녀의 몸을 돌려서 품에 가두듯이 더욱 세게 안았다. 톡! 번져 나가는 눈물이 그의 목에도 떨어졌다. '“놓아주세요, 백작님.”'“편지에 쓴 너의 큰 바람이란 게 뭐지, 밤비나?”'“…….”'“애나, 내 귀여운 밤비나.”'애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백작은 달래어 주기 위해 더욱 더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럴수록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말할 수 없니.”'“저는, 전…….”'“내 사랑.”'애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백작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는 내 하나뿐인 연인이란다, 밤비나.”'백작이 몸을 놓아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애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창백하게 얼어붙어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안타까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아름다운 자줏빛 눈동자에는 쓰디쓴 고통이 지나갔다. '“……저는 사생아에요, 백작님……. 그 사실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아요.”'“밤비나, 그 일은 중요하지 않아.”'애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백작님을, 미쳤다고 욕할 거예요. ……저를, 천한 창부라 욕한다 해도 상관없지만……, 백작님은 안 돼요. 가장 높은 곳에서 존경을 받으셔야 할…….”'“너를 잃는다면 그게 모두 무슨 소용이 있겠니.”'“백작님.”'“사랑한다, 애나.”'갑작스런 고백에 애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백작은 그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간단히 해내었다. 귀족들에게 사랑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발에 치이는 돌처럼 하찮게 여겼다. 가벼운 연애와 사랑은 동일 선상에 놓인 것이기에 하찮은 신분에 있는 자와의 사랑 역시 비웃음을 당했다. '애나는 이 모든 게 두려웠다. 무엇보다 백작은 명망 있는 귀족가의 장자였고 앞으로 후작이 될 사람이었다. 그 지위가 갖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백작님께 들었던 말로 충분히 저는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저로 인해 체면을 잃지 마세요.”'“나는 너 없이는 살 수 없단다. 기억에 의지하며 살아가기에는 나는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거든.”'백작이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동그란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얘기하거라. 나는 이제껏 너에게 한마디도 듣지 못했구나.”'“할 수…….”'“어서.”'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백작이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더 주며 재촉했다. 입술이 붙은 듯 한참이나 입술을 벌리는 데도 힘겨웠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이나 용기를 북돋아야했다. '“……사랑해요, 백작님. 백작님은, 제 전부, 제 인생이세요.”'“너는 그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