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 살이 에이는 한겨울의 바람처럼 매섭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아침 뉴스에선 눈이나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오후가 되자 때늦은 눈발이 간간히 날리고 있었다. 눈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 사라졌다. 높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부딪쳐 갈 곳 잃은 바람은 사나운 맹수의 발톱처럼 세차게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의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마다 함께 심한 먼지와 매캐한 매연의 냄새가 묻어났다. 따뜻한 서점에서 나오면서 갑자기 찬바람을 맞은 사람들은 한 번씩 등을 돌려 바람을 맞았다. 서점 앞은 좌판이 벌어진데다 퇴근 시간이 맞물려 도시 한가운데 작은 벼룩시장을 만들었다. '태호는 사람들이 붐비는 인도 중앙에서 비켜 한쪽에 서 있었다. 교복을 벗고 청바지와 짙은 올리브색 재킷을 입고 있는 태호는 거리의 사람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키는 보통의 어른의 키에 다다라 있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시선은 한곳을 응시했다. 어딘가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처럼 눈매가 매서웠다. 곧은 선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잘빠진 턱 선은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보이게 해 아직 소년인 태호를 또래 사내 녀석들과는 사뭇 달라보이게 만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보지만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호의 눈은 작은 계집아이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좌판에 펼쳐진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계집아이는 좌판에 펼쳐진 물건들이 신기해 잡고 있는 손을 놓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장사치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묻자 싫은 내색 없이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향로라고 향을 피우는 그릇이란다.”'양쪽 손잡이 부분에 용머리가 화려하게 붙어 색이 바란 자주색의 도자기였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조잡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지만 아이는 처음 보는 화려한 물건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다시 옆에 놓인 물건을 집었다. 작아서 손에 딱 들어오는 동그란 통은 화려하게 무늬가 새겨진데다 빛이 바래 더욱 예뻐 보였다. '“이건요?”'장사치는 작아도 그래도 여자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귀찮아하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연지통. 옛날 여자들이 입술에 바르던 거. 요즘 식으로는 립스틱.” '계집아이는 작은 물건이 탐이나 물었다. '“이거 비싸요?”'“이 만원.” '“그렇게 비싸요. 이 조그마한 게.”'장사치가 말한 가격에 놀라 계집아이는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워하며 물건을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생전 처음 보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아 좌판을 한참이나 구경하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이 허전하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키로 팔짝팔짝 뛰었다고 하지만 보통의 아이보다 작은데다 뛰어도 어른의 키를 넘기기는 어려웠다. 계집아이는 애가 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움직이려고 했지만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 끼여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아이가 팔짝 뛰면서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쳐 넘어지려는 걸 뒤에서 태호가 잡았다. '“조심.”'태호는 계집아이를 그대로 안아 높은 단상 위에 올려주었다. 조금 전부터 작은 키로 보겠다고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는 게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아이는 누가 자신을 잡아 준 것보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올라가자 놀라 입을 벌리고 태호를 쳐다봤다. 곧 시선을 거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전화박스 앞에서 자신을 찾고 있는 엄마가 보이자 소리쳤다. '“엄마, 엄마.” '계집아이는 단상 위에서 팔딱이며 손을 흔들어 엄마를 불렀다. 계집아이의 엄마 역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엄마를 부르는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도시의 소음 속에서 반사되어 추운 겨울 개울가의 흐르는 물소리처럼 맑고 청명하게 들렸다. 태호는 계집아이가 높은 단상에서 무서운 것도 없이 팔딱이자 떨어질 것 같이 위태해 보여 행여 떨어지면 받을 태세로 팔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