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다. 혹시 이게 나한테 다가온 어떤 행운이 아닐까 기대하고 갈망했지만, 돌아오는 건 늘 같은 자리, 같은 생활의 반복.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나. 고아원 출신의 보잘것없는 여자아이에게 세상이 내어 줄 수 있는 호의라는 것이, 그리 기대 할 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눈치 빠르다고 칭찬 받으며 자랐고,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가 있어 주변의 사물을 아무 어려움 없이 쓱쓱 잘 그리곤 했었다. 그 흔한 미술 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이 오히려 틀에 박힌 입시미술의 식상한 틀에 갇히지 않게 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신선한 평을 이끌어 내곤 했던 것이다.'나름 관심을 가져 준 후원 가정의 보살핌과 기대에 부응하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정말 운 좋게도, 정부의 농어촌지역 특별 전형이 실행된 그 해, 민수는 수능 성적과 실기시험 외엔 별다른 학업실적 없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의 S대 서양화과에 합격을 한 것이다. 엄마같이 19년을 보살펴 주신 클라라 수녀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고아원 역사상 첫 S대 합격생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함께 부푼 가슴을 안고 상경한 지 벌써 3년째가 되었다.''어둠이 가시지 않은 작은 방. 희뿌연 새벽빛이 어스름한데 느닷없이 작은 알람시계에서 짜증스러운 벨 소리가 자지러졌다. 방 안 한 귀퉁이에서 꾸물거리는 사람의 몸짓이 보이고, 곧 둘둘 말린 이불 밖으로 마지못해 팔을 내밀고 시계를 찾는 가느다란 손이 보였다.'“아아 벌써, 아침이야? 후우…….”'갈라진 목소리에서 피곤이 묻어났지만,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민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으으…… 야, 그냥 좀 더 자. 내가 일어나서 할게. 너 어제 작업실에서 늦게 왔잖아.”'민수는 어차피 피곤에 절어 있긴 마찬가지인 영선의 말에 씩 미소를 지었다.'“아냐. 나, 오늘 수업 때문에 점심 장사도 못 도와주는데, 아침에 미리 좀 해 놓고 갈게. 너나 좀 더 자.”'트레이닝에 달린 후드를 훅 뒤집어쓴 민수는 작은 가게와 연결된 방문을 삐걱 열고 나왔다. 으스스한 찬 공기 속을 떠도는 희미한 카레와 돈가스 냄새, 그리고 오래된 커피머신에서 나는 묵은 커피찌꺼기 냄새까지, 이 모든 냄새는 민수와 영선의 인생을 책임지는 생활의 냄새가 된 지 오래였다. 영선이 매달 은행이자와 월세에 쫓기며, 굳이 이 비싼 학교 앞 가게를 고집한 것은 갓난아기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매처럼 지낸 민수의 학교생활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이유가 컸다. 상식적으로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를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데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족에의 그리움, 그 처절한 상실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때로는 피보다 진한 절절한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니까.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늘 옆에서 씩씩하게 민수를 챙겨 주고 보살펴 준 영선은 자기보다 한 살 어려도 그림 잘 그리고 공부도 잘하는 민수의 곁에서 마치 친언니같이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며 늘 행복해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죽어라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찌감치 장사에 눈을 떴고, 별 흥미 없던 학교나 공부 대신 나중에도 혼자 살아갈 궁리에 악착같이 돈을 모아 고등학교 졸업 무렵엔 또래 아이들은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꽤 큰 목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후에 약간의 지원금을 얻어 고아원을 나오자마자 낯선 서울의 식당과 카페를 전전하며 자신이 자리를 잡을 만한 일과 가게를 알아보느라 온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발품을 팔고 돌아다녔다.'드디어 1년 후, 민수가 보란 듯이 S대에 합격을 하자, 정말 자신에게 큰 행운이라도 닥친 듯 기뻐하며, 다소 무리였지만 민수의 학교 앞 골목 귀퉁이에 두 평짜리 작은 방이 딸린 가게를 얻어 이사까지 한 그녀였다. 민수는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카페의 주방에 불을 켜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다란 양푼에 쌀을 씻었다. 그리고는 가게 문을 열고 매일 배달되는 채소를 안으로 들여와 주방 한구석 타일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씻고 다듬기 시작했다. 망에 든 양파와 양배추, 당근, 감자를 알맞게 깎고 자르고 다듬고, 거침없는 익숙한 손놀림은 한눈에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느덧 환한 아침 햇빛이 가게 유리문을 통과할 무렵, 민수와 영선은 어제 남은 미역국에 다시 데운 찬밥 한 그릇에 단무지와 오이지를 차린 간소한 아침상을 놓고 마주 보며 아침을 먹고 있었다.'“아, 맞다. 지난주에 들어온 카레는 맛이 좀 다르던데, 너 그거 알아?”'영선은 금방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도매상 아저씨 말만 듣고 좀 싸다고 바꿨더니 영 아니더라. 그래서 남은 건 반품하기로 했어. 계집애, 귀신같이 잘도 알아챈다니까? 걱정 마셔. 이 언니 돈 몇 푼에 맛까지 포기하는 비양심적인 사람 아니다?”'“헤에, 잘했어. 나 때문에 우리 과 애들도 자주 오는데, 맛이 이상하면 내가 왠지 미안해서 말이지. 아! 지난달부터 은행 이자도 올랐다면서…… 괜찮겠어? 걱정돼.”'“어이구, 넌 그런 거 걱정 말고, 학교나 열심히 다니고 작품이나 신경 써. 이제 점심장사 도와줄 생각도 하지 말고, 방학도 끝났으니까 매상도 나아질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동안 뭐, 잘해 왔잖아 우리.”